단어 '장애'의 힘

장애의 단어가 문제가 아니라, 단어가 만드는 힘이 문제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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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경(jude0922)등록 2020.08.13 15:39
프랑스면 파리, 파리하면 루브르를 다녀와야 "나 파리 좀 가봤어" 할 수 있을테다.  그리고 나는 하물며 거길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자랑을 좀 늘어놓겠다.
온 세상의 난다긴다 하는 예술품들을 모아 놓은 루브르에서 내가 한참 머무른 그림이 있다.
리슐리외관에 있는 16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풍속화가인 피테르브뢰헬(Pieter Brugel the Elder)의 그림이었다. 제목은 [The Blind Leading the Blind(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하는 업이 무섭다고,  딱 봐도 장애인을 그린 듯한 그림이고, 제목 역시 그러했기에 작가가 누군지, 뭘 의미하는 건지, 그 자리에 서서 검색을 해봤다. 제목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었다.
다행히랄까? 브뢰헬이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은 아니었고, 마태복음에서 어리석은 지도자를 비유하는 내용의 문구를 그림으로 나타냈을 뿐이고(장님이 장님을 이끌면 둘다 구덩이로 빠진다는 구절로, 잘못된 지도자는 모두를 혼란에 빠트린다는 비유로 역시 부정의 비유이다)  풍속화가다 보니, 그림체가 조금 더 익살스러웠으리라 이해를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비유적 표현을 보면서 이 그림이 떠올랐다.  상황을 장애에 비유하는 것의 역사가 오래도 되었구나 싶었다. 16세기 북유럽에서도 그랬고, 서기가 시작되자 마자 마태오가 복음서를 쓸때도 그러했구나 싶다.
뭐든지 적절한 비유는 대중의 인식을 환기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것은 맞다. 효과성이 좋다는 말이다.
문제는 효과성이 좋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불편함을 부정적인 상황으로 비유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은 올바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장애라는 것이 비유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긍정적인 비유는 없었다. 마테오도 나쁜지도자를 장애에 비유했지 않은가.
부정적인 장애에 대한 비유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 확고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왠만하면 하지 맙시다 하는거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이것저것 있습디다. 왜 못쓰는 겁니까?
라는 질문에 굳이 대답을 하자면
"못쓰는게 아니라, 쓰다보면 장애는 계속 나쁜거라는 인식이 박히고, 그 인식은 결국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상황을 더 만들어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좀 자제합시다." 라고 말이다.

단어에 부여하는 사람들의 합의가 만들어내는 편견의 힘은 강하다. 온갖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치와 여성은 어떠한 잘못도 없지만 '김치녀'는 막강한 부정적인 힘을 가진다. 한국남성과 벌레 역시 그닥 잘못하지 않았지만 '한남충'은 나쁘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쓰여진지 얼마 안되는 단어인데도 말이다.

'장애' 역시 장애인 당사자의 개인의 잘못도 아닌데 이미 수천년 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지 않은가.
브뢰헬이 살았던 16세기에 뭔 인권감수성을 기대할 수 있었겠냐마는, 그래서 루브르에도 멋있게 그림이 걸려있겠지만, 지금은 21세기이지 않은가?
이제는 나와 다름에 대해 생각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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