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치 해돋이와 개령암터 마애불

지리산 해돋이와 개령암터 마애불을 보여주는 정령치

검토 완료

고태규(tgko)등록 2020.08.10 14:45
전주에 사는 친구 김박사가 지리산 정령치로 해돋이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지리산 해돋이는 천왕봉이지 무슨 정령치냐고 했더니, 정령치에서는 해돋이와 천왕봉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산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뱀사골 부근에 있는 달궁마을에서 김박사는 맛있는 지리산 흑돼지와 막걸리를 사주었다.
 
우리는 달궁마을 민박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정령치(해발 1172미터)로 향했다. 정령치 주차장에 도착하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지리산 새벽안개를 찍으러 온 사진작가들의 차만 새벽이슬을 흠뻑 맞은 채,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아직 해는 올라올 기미도 안보였다. 우리는 추워서 차 안에서 대기했다.
 
조금 기다리자, 동쪽 하늘에 조금씩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어떤 새들은 벌써 일어나서 신나게 지저귀고 있었다. 저 새들의 목소리를 알고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정령치를 감싼 새벽안개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마치 수많은 군중들이 무언가 쳐부수러 가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보였다.
 
희뿌연 동쪽 하늘에는 구름이, 지리산 허리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서 더 멋지고 볼만했다. 구름에 잠긴 동쪽 하늘에 서서히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하얀 화선지 위에 먹물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먹물 대신 복숭아꽃 같은 선분홍색 물감이. 정철(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 동해안의 일출을 묘사한 것처럼 멋지게 글을 쓰지 못하는 나의 재주가 안타까울 뿐이다.
 
천왕봉은 오른쪽 멀리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고, 맨 오른쪽에 있는 반야봉과 노고단은 구름 속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맑을 때는 해돋이와 함께 지리산 연봉들을 볼 수 있어서 더 멋지다고 한다. 반야봉과 노고단이 정상을 덮고 있는 구름 때문에 마치 벙거지 모자를 머리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좀 우스웠다.
 
동해안 일출은 자주 보았어도 지리산 일출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바다에서 해가 오르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몽골의 고비시막이나 중국의 타클라마칸사막, 우즈베키스탄의 키질쿰사막에서 본 일출 모습과도 달랐다.
 
사진: 정령치 해돋이
  

지리산 정령치 일출 ⓒ 고태규

 
드디어 구름 속에서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구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는 선홍빛이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노란색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모습은 빠알간 선홍빛 색에 가까웠다. 정말 신비로운 색깔이었다. 이번 일출을 보고 나서,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보려고 야간이나 새벽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사실 이보다 3일 전에 나는 혼자서 정령치에 왔었다. 지리산에 200밀리 폭우가 쏟아지던 바로 그날 아침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비를 맞고 있는 개령암터 마애불(보물 1123호)을 동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꼭두새벽에 폭풍우 속에 산속에 들어가다니.
 
아침 7시에 템플스테이로 묵고 있었던 천은사에서 예약한 택시를 타고 정령치로 출발했다. 이때부터 이미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정령치 주차장에 도착하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주차장에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혼자 마애불을 찾으러 나섰다. 주차장에서 10미터쯤 계단을 내딛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자마자, 엄청난 폭풍우에 우산이 훌러덩 날라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택시기사님의 우산을 빌려 다시 길을 나섰다.
 
폭우는 폭풍을 동반하고 있어서, 몸은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신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가 고인 산길에 발이 푹푹 빠졌다. 이른 아침에 폭풍우를 맞으면서 산속에서 폐사지를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더 힘들었다. 이지누씨 책에는 정령치 주차장에서 고리봉 쪽으로 2,3백 미터라고 되어 있었는데, 정령치 이정표에는 5백 미터로 되어 있었다. 걸어가 보니, 실제로도 그랬다.
 
개령암터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등 지리산 연봉이 환상적이고, 밤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져 내린다고 책에 소개한 이지누씨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사진작가이자 평론가인 이지누씨(현재 경향신문에 칼럼 연재 중)가 쓴 폐사지 답사기 전북편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 소개된 개령암터에 관한 글을 읽고서 감동을 받아, 이번 지리산 답사 중에 여기에 꼭 와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이다. 내가 폐사지 답사는 아직 시작을 안했기 때문에 여기는 처음 와보는 곳이라 더 힘들었다.
 
사진: 개령암터 마애불
  

지리산 정령치 개령암터 마애불 ⓒ 고태규

 
그 대가는 참혹했다.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치는 폭풍우 때문에 12개라는 마애불 중 겨우 대여섯 개만 보았을 뿐이고, 쓸만한 사진은 한 장만 건졌을 뿐이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폭풍우 속에서 어렵게 찍은 동영상은 나의 과실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핸드폰 카메라 저장용량이 적어서, 다른 곳에 옮기려다가 어디론가 날아 가버린 것이다. 언제 다시 그런 동영상을 찍을 수 있을지.... 가슴이 막막했다. 그래도 그 빗속에 인자하신 마애불 몇개라도 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오자, 택시기사는 나를 기다리며 자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이 간절한 아침이었다. 폭풍우는 여전히 지리산을 몰아치고 있었다.
 
이랬던 정령치에 사흘 후에 다시 와서, 친구와 함께 해돋이를 구경하니 감회가 새롭다. 내내 내렸던 비도 멈추고, 오랜만에 해가 나왔다. 우리의 정성이 산신령님께 통했나? 호우주의보 속에 잠깐 비친 정령치 해돋이를 보여주고, 빗속에서라도 개령암터 마애불을 만나게 해주신 지리산 산신령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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