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 걸으면서 신선놀음이나 해볼까나

지리산 뱀사골 신선길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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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규(tgko)등록 2020.07.31 17:13
오늘은 지리산에 들어온 지 열흘째. 칠선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좋은 계곡 중의 하나인 지리산 뱀사골계곡을 걷는 코스다. 한 여름이나 단풍철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산중 돛대기 시장으로 변하는 곳이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인지, 아니면 호우주의보 때문인지 등산객들이 거의 없어서 너무 좋다. 이 계곡이 모두 내 정원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비까지 보슬보슬 내리고.
 
뱀사골이라는 이름은 <남부군>의 저자 이태에 의하며, 그곳에 백암사(白岩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 백암사를 옛말 사람들이 편하게 '배암사'로 부르고, 그것이 줄어서 '뱀사골'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뱀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이다. 피밭(稷田: 직전)골이 '피아골'로 불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다.
 
이 뱀사골 코스는 몇 단계로 나누어 걸을 수 있다. 우선 초보자들을 위한 '뱀사골 신선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뱀사골 입구(반선마을)부터 와운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인 와운교까지 약 2킬로미터가 뱀사골 신선길이다. 계곡물을 따라 나무 데크로 아주 안전하게 걷는 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 휠체어도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어,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길이다.
 
이 코스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도보길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바로 위쪽으로는 와운마을까지 들어가는 차량 도로가 계곡을 계속 따라온다. 이 코스만 해도 왕복 4킬로미터이니까, 초보자에게는 걷기에 충분한 거리이다. 또한 반선마을 버스정류장이 뱀사골 입구가 아니라, 입구에서 5백 미터쯤 아래쪽에 있는 상가 앞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왕복 5킬로미터를 걷게 된다.
 
사진: 뱀사골계곡(동영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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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계곡 ⓒ 고태규

   
중급자 코스는 와운교에서 7백 미터 쯤 떨어진 와운마을까지 가는 길이다. 와운마을까지 왕복 1.4킬로미터이니까, 전체 6.4킬로미터쯤 걷는 코스가 된다. 와운마을에는 팬션 몇 개와 식당이 있어서 숙식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마을에는 천연기년물인 천년송이 마을 뒷자락에 우뚝 서있다. 와우마을 쪽으로도 계곡이 있고, 나무 데크길이 되어 있어서 걷기에 좋다. 단지 마을까지 계속 상당한 오르막이어서 초보자에게는 좀 힘이 들 수도 있다.
 
상급자 코스는 간장소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로 왕복 19킬로미터가 된다. 뱀사골 버스정류장에서 와운교까지 2.5킬로미터, 와운교에서 간장소까지 약 6.5킬로미터, 편도 9킬로미터이니까, 왕복 18킬로미터를 걷는 셈이다. 와운교에서 간장소까지는 거리는 길지만 고도 차이가 별로 없어서, 걷기에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이 코스엔 중간에 먹을 곳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여기를 걷는 사람은 반드시 먹을거리를 챙겨가야 한다.
 
간장소까지 걸을 사람들은 와운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길을 나서면, 여유 있게 1박 2일을 뱀사골에서 보낼 수 있다. 등산을 하고 싶은 사람은 간장소를 거쳐, 약 2.6킬로미터 거리인 화개재로 넘어가면 된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이고, 여기부터는 엄청 급경사여서 등산객들만 다니는 코스이기 때문에 초중급 도보여행자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사진: 뱀사골계곡(동영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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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시골계곡2 ⓒ 고태규

 
뱀사골계곡은 소문대로 정말 수량이 풍부하고, 물소리도 얼마나 상쾌한지, 계곡물을 따라 걷기만 해도 가슴이 후련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진다. 잠시나마 이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자연과 어울려 신선놀음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식(蘇軾: 소동파)이 지은 전(前)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한 구절로, 팔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 걸음걸음마다 계곡의 모습도 다르고, 물이 흐르는 모습도 달라서 계곡물에 첨벙 몸을 담그고 싶은 유혹을 엄청 느낀다. 천변만화가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가 한다.
 
걸어가는 나무 데크 군데군데 물로 내려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있기 때문에 물가로 내려가서 바위에 앉아 탁족을 즐겨도 좋다.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이런 곳에 와서 1박2일 동안 쉴 시간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너무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해외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이렇게 보석 같은 휴식처가 널려 있다.
 
사진: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비트
  

빨치산 비밀 아지트 지리산 뱀사골에 남아있는 빨치산 비트 ⓒ 고태규

 
뱀사골계곡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휴식처를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현대사도 안고 있다. 해방부터 6.25 전후까지 북한을 추종하는 빨치산들이 뱀사골에 숨어들어, 여러 활동거점(비트: 비밀 아지트)을 만들고 게릴라전투를 벌였다. 지리산이 그렇게 넓고 깊었기 때문에 최대 1만여 명 가량의 빨치산들의 배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곡물을 이용하여 작은 수력발전기까지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 무전을 치거나 인쇄를 하여 신문 등 각종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비트들이 아직도 골짜기마다 몇 개 씩 남아 있어서 우리 가슴을 슬프게 한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마을에서는 1949년 4월 9일 새벽 3시에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들인 김지회 홍순석 두 중위가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토벌대에 의해 피살된 곳이기도 하다(이하 이태 저, 남부군, 두레출판사 참조). '붉은 스웨터의 여두목'라는 엽기적인 제목으로 신문에 오르내렸던 김지회의 애인 조경순도 사흘 후에 바로 위에 있는 달궁마을에서 생포되어, 그 해 9월 서울 수색 사형장에서 총살되어 영원히 애인 곁으로 갔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오가는 뱀사골 입구가 바로 그 비운의 연인들의 마지막 이별 장소인 것이다.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믿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과 유토피아를 꿈꾸며 청춘을 불사르고 희생했지만,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지리산 계곡에서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산화되었다. 뱀사골 신선길은 그때 사라져간 이름 없는 빨치산들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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