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정문
연합뉴스
최근에 일부러 여러 세대의 사람들에게 이 '출세'라는 말을 어떤 어감으로 이해하는지를 물어봤다.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말을 긍정적인 것으로 쓰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해야지", "그래, 너도 이제 출세할 때가 됐지", "나중에 출세하면 잊지 말고 후배들도 챙겨주고 그래", 이런 식이다.
40대 전후 사람들은 대체로 약간의 조롱하는 투를 담아서 쓴다. "너 이제 출세했다 이거냐?", "그 선배 아직도 그렇게 출세하려고 애쓰냐?" 이런 식이다. 30대 이하의 세대는 어떨까? 출세가 긍정적인 말이었다는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출세주의자'라는 식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물불 안 가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만 쓰이는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왜 이런 간극이 생겼을까? 본래 출세라는 개념 자체가 전근대적인 사회 작동 원리인 '정실자본주의'(情實資本主義)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오는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출세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모두 인정됐다. 첫째, 출세한 사람은 부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 둘째, 출세하는 데는 집안과 친지와 학교 및 지역 사람들의 조력이 어느 정도 있었으니, 출세를 통해서 얻은 권한으로 얻게 된 것을 이들과 나눠야 한다. 예를 들어 일자리, 사업 기회, 투자 기회 등이 생기면 이를 적극적으로 배분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출세해서 그런 기회가 눈에 보이는데도 나누지 않고 원칙대로만 처리한다면 지극히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공부를 잘 해서 어떤 직위에 올라서 특정한 권한이 생긴 엘리트는 이를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친지, 학연과 지연 네트워크를 위해서 쓴다. 이를테면 고향 부모님이 "네 사촌 그 아이가 참 성실한데 취업을 못 해서 삼촌이 걱정이 많으시니 어떡하냐"고 하소연하시는 것도 들어 드려야 하고, 대학 동창이 "우리 같이 활동했던 OOO가 고생 많이 하다가 겨우 사업 하나 차렸는데 어떻게든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 하는 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말을 소홀히 했다가는 일가친척과 동문들 사이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욕을 먹을 것이다. 그래서 사촌 취직자리도 소개해 주고, 동창의 사업체가 납품할 만한 데도 알아봐 준다. 이것이 바로 정실자본주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문제의식을 가질 리 없다. '나 정도면 충분히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는 동안 같은 조직 내에서 성실하게 일 하는 비정규직 또는 별도 직군의 직원이 자신들의 네트워크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은 임금을 받다가, 낙하산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사에 밀려서 이유도 모르고 해고된다는 사실까지는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실력보다는 학연·지연으로 경쟁해야 살아남는 경제 구조 속에서 기업과 산업의 진짜 경쟁력은 침식당하게 된다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속한 진짜 공동체는 조직이나 국가가 아니라 '출세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지역에서 왜 청소년과 청년들을 공부 잘 하는 순서대로 서울로 보내며, 그들에게 각종 지원까지 하는지도 알 수 있다. 그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지역 사람들을 취직시켜 주고, 사업 및 투자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역으로 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울에서 오는 자원을 나눠서 먹고 사는 편이 지역 안에 있는 자원만 가지고 잘 살려고 애쓰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균열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통해서 86세대의 사회 자원 독점을 화두에 올린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비판 지점도 같은 맥락이다. 한때 나라를 위해서 안정된 직장을 뒤로 한 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퇴학과 수배, 고문까지 감수했던 86세대였지만, 그들에게도 출세주의 그리고 정실자본주의의 문화는 내재돼 있었다.
어느덧 민주화가 이뤄지고 언론과 대학, 정치권과 기업들의 권력 중심부에 그들의 '동년배', 그리고 '친구의 친구'가 즐비하게 됐다. 이 네트워크를 통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상 일자리와 사업, 투자 기회들이 보이면 이 네트워크 안에서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자녀의 대학 입시를 위해서 인턴·실습 기회들을 나누는 것도 포함된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왜 도덕성을 중요시한 86세대 안에서도 '미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까 의문도 이 지점에서 조금 풀린다. 출세한 '남자'가 누릴 수 있는 것 중에는 성적(性的)인 욕망을 풀 권한도 있다는 것이 암묵적인 상식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그러려고 출세하지, 뭐 하러 출세하겠나?"라는 농담이 한 때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 욕망은 혼자 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있어야 하고 출세로 획득한 '권한'을 이용해서 쉽게 풀면 성폭력이 되고 마는데, 그 사실을 어떤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출세주의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 역할만을, 불편부당하게 수행해야 할 뿐이다. 일자리와 사업과 투자 기회 같은 것들을 공정한 절차 없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오히려 가족과 지인들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의 상식이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들, 취업 청탁으로 인해 국회의원, 금융지주 회장까지 재판을 받는 사례들을 보면 출세주의가 깨졌다는 신호가 선명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를 감지 못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방 도시의 기성세대들이 특히 그럴 것이고, 때문에 지역 청소년들을 성적 순으로 서울로 밀어 올려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