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남성 유학자들이 서술한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그를 타락한 여성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이 담겨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지만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이런 사실들이 부각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남성 유학자들이 서술한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그를 타락한 여성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독자들이 천추태후의 역사적 업적을 알려면 <고려사> 여기저기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까지 참고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이 얼마나 편파적인지는 열전의 맨 앞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추태후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왕태후 황보씨는 대종(戴宗)의 딸이며 목종을 낳았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응천계성정덕 왕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목종의 나이가 18세가 된 뒤에도 태후가 섭정하고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이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위와 같이 프로필을 소개한 뒤 천추태후 열전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본론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그는 김치양과 사귀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정하려고 했다."
인적 사항을 소개한 부분이 끝나고 본론이 시작되자마자 김치양과의 이성교제부터 대뜸 언급했다. 또 여기서 생긴 아들을 차기 군주로 앉히려 한 사실을 거론했다. 선입견을 조장하기 쉬운 서술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김치양과 사귀어'가 <고려사> 원문에는 '여김치양통(與金致陽通)'으로 돼 있다. 여(與)는 영어 with와 같은 의미다. '사귀다'에 해당하는 원문 글자는 '통(通)'이다. '통'이란 글자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이를 불법성을 풍기는 '간통'이란 한국어로 풀이한 번역서들이 있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다.
'통'을 '사귀다'로 번역하든 '통정하다' 혹은 '간통하다'로 번역하든, <고려사>를 읽는 독자들은 천추태후의 업적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이성 관계에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인물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힘들게 돼 있는 것이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 했다는 서술도 오해를 일으킬 만하다. 자세한 설명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 독자들은 천추태후가 남자에 눈이 멀어 왕씨의 나라를 김씨의 나라로 만들려 했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
하지만,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과 더불어 목종세가(목종 편)을 종합해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 자체는 별다른 법적 문제점이 없었다. 고려 초기의 왕실 풍습은 신라 왕실과 유사했다. 신라에서는 사위를 양자로 입양한 뒤 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아들과 사위의 왕위계승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사실과 남해왕의 증외손이자 석탈해의 손자인 벌휴왕이 등극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는 공주의 피를 이어받은 외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왕실의 풍습을 계승한 고려 초기 왕실에서 천추태후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고려사> 필진과 오늘날의 <고려사> 번역자들은 그 속에 뭔가 부조리가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유교적 관점으로 고려 초기 왕실의 결혼 풍습을 임의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천추태후가 역사에 끼친 영향보다는 그가 남긴 사생활 흔적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위와 같이 여성 위인의 이성 관계는 뭔가 문제가 있는 듯이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남성 위인의 이성 관계는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경우가 참으로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성 편력에 관한 서술이다.
주몽과 무측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이 임신한 첫 부인 예씨를 버리고 동부여에서 도주한 뒤 소서노라는 권력자와 재혼하고 그 힘을 빌려 고구려를 건국한 다음에 소서노마저 배신하는 사실관계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기록을 읽고 '주몽은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갖는 독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가까운 여성에 대해 책임과 도리를 지키지 않는 주몽의 행동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고구려를 세우는 주몽의 정치적 활동이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필진이 김부식을 비롯한 남성 유학자들이었기에 이런 서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몽에 대해 관대함을 보여준 김부식은 선덕여왕이나 당나라 무측천에 대해서는 너무나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무측천은 당나라 황후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어 주나라(무주)를 15년간 경영했지만, 측천무후라는 황후 타이틀로만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또 그가 세운 주나라도 '없었던 나라'가 돼버렸다. 무측천의 주나라 건국 때문에 당나라는 690~705년 기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당나라가 618~907년 기간에 끊김 없이 존속했던 것처럼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