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코로나독감은 이미 다른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욱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바이러스는 사람뿐 아니라, 사회가 앓는 '기저질환'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비대면 산업'이라는 작은 빙산의 밑에 자리한, 거대한 대면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그러하다.
한국 사회의 질병은 그저 불안한 고용과 위험한 노동환경만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회가 대면노동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한다는 점이다. 플랫폼 배달, 택배, 콜센터 노동자들은 하루 밥벌이를 위해 바이러스와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며, 내일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오늘 증상을 안고 출근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경제의 다리 역할을 맡은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이를 보지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면 멀쩡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 이후 산업은 비대면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을 보면, 대개 출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화상회의로 출근을 대신해도 월급 제때 나오고 실직 걱정도 없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상위 절반의 소득층에서 절반 정도가 재택근무가 가능하지만, 하위 절반 소득층에서 재택근무가 가능한 취업자의 비율은 10% 미만이다.
'비대면 어쩌구' 하는 소리가 고위 공무원, 기업 임원, 정년 보장받은 교수들에게서 주로 흘러나오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사람들이 그저 제 행운에 조용히 감사하면 다행이겠으나, 대개는 그런 운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술의 진화가 이렇게 간다는 둥, 노동의 개념이 저렇게 변한다는 둥 훈계까지 늘어놓길 좋아하니 문제다.
얼마 전 한 시사주간지는 '코로나 뉴노멀'이라는 특집호를 내면서 한 유명 교수에게 '에필로그'를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인류는 '지금보다 덜 일하고 덜 만나도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재택근무 경험은 우리에게 이제 노동이 시간과 장소에 묶인 개념이 아니라 역할과 책임에 좀 더 밀접한 개념임을 깨닫게 했다."
'덜 일하고 덜 만나도 사회가 돌아간다'면 뭐가 걱정이겠는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정부가 온갖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언론사도 부랴부랴 특집호를 기획한 게 아닌가. 위기의 핵심은 일하지 못하고 만날 수 없는 탓에 멈춰버린 실물경제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허울 아래 급증해온 플랫폼 노동 탓에 사람들은 '덜' 일하기는커녕 '더' 일해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판이다. 그런데도 앞 교수의 좁은 눈에는 노동이 재택근무로 대체 가능한 일에 한정되며, '시간과 장소'에 예속된 무수한 대면노동자들은 '인류'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플랫폼 노동자만이 아니다. 상점과 백화점의 점원, 식당 조리사, 청소부, 버스와 택시 기사, 설치 기사,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등은 모두 정해진 시간에 맞춰 특정 장소로 이동해야만 밥벌이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취업자 4명 중 1명에 달하는 자영업자들 역시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등 시간과 장소에 구속된 노동을 하며, 이들 다수가 생계를 유지하지 못해 플랫폼 노동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디지털 그린 뉴딜'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데이터 댐', '지능형 정부', '스마트 시티', '스마트 의료 인프라' 같은 기술적 수사로 가득 차 있을 뿐, '뉴딜'의 핵심이 돼야 할 저소득층 복지 확대, 기존의 일자리 안정 대책, 새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구체적 방안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