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면 못해주니까 지금 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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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규(kimsea6)등록 2020.06.15 14:57
이혼하면 못해주니까 지금 해주는 거야!
 
결혼생활하며 위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 한 공간, 한 이불 속에 산다고 해도 모든 것이 맞을 수는 없다. 끝없이 서로를 살피고 이해하고 존중하며 배려해야만 겨우겨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부부다. 요즘 아내는 '부부의 세계'이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산다. 사회경제적으로 출세한 중산층 가정의 부부가 남편의 외도로 파경을 맞으며 겪는 다양한 상황들이 주 내용이다. 사람의 삶이란 모르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졌다고 해도 실제로는 불만이 쌓이고 쌓여 곪아 터지기 직전인 경우도 많다.
결혼경력 28년째. 우리 부부에게도 한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싸움을 즐기지는 않지만 가끔 트러블도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해놓고 홀랑 자리를 떠버리는 아내의 야비한 행동(?) 때문에 혼자 부글부글 끊었던 적도 많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신혼 초부터 약속한 것이 있다. 아무리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도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말자는 약속이다. 농담으로라도 그 말 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약속을 지난 28년 간 지켰다. 그런데 지난 주말 아내가 약속을 깼다. 아내는 대뜸 '여보, 이혼해!'라고 내질렀다. 건조한 톤이었지만 자못 생경한 어휘에 화들짝 놀라 아내를 쳐다봤더니 픽하고 웃는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올 2월 말로 교직에서 명예퇴직 하면서 아내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말로는 '프리랜서'니 뭐니 떠벌려도 나는 고정 수입이 없는(연금은 제외하고) 백수다. 아이들은 아직도 대학생이고, 대학을 졸업하는 큰 아이는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학교 2학년 아들은 올 연말 군 입대를 한다고 말했지만 전역 후에는 여전히 학비가 필요하다. 더구나 아들놈은 생화학도다. 돈 안 되고 취직도 힘든 학과다. 학부를 마치면 대학원에 진학해야 연구소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 심성은 착하지만 어벙벙 해서 취직 전까지는 제 앞가림도 못할 놈이다. 나의 퇴직으로 아내는 그 짐을 모두 짊어졌다. 그것은 평택과 안성에 있는 두 개의 매장을 뛰어다니며 앞으로도 최소 5년간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게감 때문인지 아내는 퇴직서류를 접수하고 온 날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측은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꿀릴 게 없다. 지난 30여 년 나도 그 짐을 걸머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남녀평등 세상에서 남자만 평생 가족부양의 책임을 지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렇다고 내가 나 몰라라 하는 성격도 아니다. 아내가 식당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가사노동은 전적으로 내가 맡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와 아이들 밥도 챙기고, 청소나 빨래도 하고 시장도 본다. 밖에서 일하다가 아이들 밥 챙겨주러 부리나케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주부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고 있다. 나의 내조 덕분에 아내는 집안 일 걱정 안하고 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집안일 하면서 프리랜서로 글도 쓰고, 조사연구 활동도 하며,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때론 강의도 한다. 그렇게 일해야 내 용돈이 생기고 시골 어머님 생활비를 부쳐줄 수 있다. 경조사 부조금도 내 몫이다. 심지어 텔레비전과 인터넷요금, 내 핸드폰요금도 내가 낸다. 이렇게 사는 짬짬이 여행과 독서를 하며 여유를 즐기려고 한다. 공부의 폭과 깊이를 더해 아직 가보지 못한 학문의 길을 걷고 깨닫지 못한 삶을 경험하고 싶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퇴직했다. 그게 뭐 잘못인가!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 오랫동안 어깨를 짓눌렀던 가족에 대한 책임, 경제적 역할을 자꾸만 나에게 상기시키려 애쓴다. 내가 하는 일들은 가정경제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한다. 며칠 전 하루 종일 글을 쓰다가 잠시 쉬려고 침대에 걸터앉았더니 아내가 말을 걸었다.
 
'여보, 평택대학교 뒤편 상가들 가게세가 무척 싸졌데. 배달 위주로 떡볶이 집을 하나 오픈하면 장사 잘 될 거야. 당신이 책임 좀 맡아줄래?'
 
뜬금없는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속을 보이면 아내는 분명 화를 낼 터이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짐짓 태연한 듯 말했다.
 
'갑자기 떡볶이 집은 왜?'
 
'국수나무는 일이 복잡하고 직원들 때문에 힘들어서 안 되겠어. 떡볶이 집은 인건비도 적게 들고 수익도 좋은 편이래. 안성매장 접고 그거라도 하나 더 해야지.'
 
아내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짬이 없다. 농담으로 '백수과로사' 운운하지만 실제로도 바쁘고 힘에 벅차다. 이럴 때 전략은 가타부타 확답을 안 하는 거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척 했다. 평소라면 이정도 액션이면 그냥 물러가는데 그 날은 달랐다.
 
'어떡할 거야. 맡을 거야 말 거야? 그냥 하루에 두 번 들러서 잘 되고 있나 살피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
 
피할 곳도 없고 더 이상 딴청만 부릴 수는 없어 돌아보며 말했다.
 
'떡볶이 집 사장은 내 컨셉 아닌데. 나 그거 할 시간 없어...'
 
말끝을 최대한 흐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내는 발끈했다. 분명 '내 컨셉' 어쩌고 하는 말에 화가 났을 것이다.
 
'뭐, 컨셉! 나는 컨셉 없어서 식당 사장 하는 줄 알아. 그거라도 안 할 거면 이혼해!'
 
아내의 이혼요구는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인상을 구기고 진지하게 던진 말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들은 '이혼'이라는 단어는 충격적이었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말할 상황에 아니어서 그냥 피식 웃었지만 참 어색했다. 어떻게 대응할까 생각하다가 희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음 날 퇴근한 아내의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며 이렇게 말했다.
 
'이혼하면 못해주니까 지금 해주는 거야'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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