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주가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그는 무심코 바다보기를 좋아한다.
김진주제공
김진주는 출소해서 박노해를 만나러 경주교도소에 갔다. 5년여 만에 보건만 시간은 불과 5분뿐. 면회소를 나서는 발걸음은 허허로웠다. 남편은 먼 산을 바라보며 "나에게 아무 기대도 말고 자기의 길을 가라"고 했다. 무기수이고 언제 나갈지 기약할 수 없는 몸이니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켰으리라. 사실 남편과는 피검 전에 보안상 이유도 있어서 별거했다. 그 탓인가, 마음도 멀어졌었는데... 서울행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 5월인데 마른 낙엽이 발에 채이고 바람은 스산했다.
경주에서 박노해와 첫 면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김진주는 곧바로 '박노해석방대책위' 활동을 시작했다. 존재적 결단을 이끌어 준 동지였고 새로운 글쓰기의 세계를 열어준 스승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박노해를 꺼내놓아야 김진주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게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위대한 긍정'을 만나다
이화여대 약학과 74학번이었던 김진주는 78년 명동에 있는 백병원 약국에 취직했다. 평범한 약사의 길을 흔든 사건은 77년에 있었다. "글쎄, 너희 오빠가.."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종 오빠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된 소식을 전했다.
그 일은 백병원의 약사 김진주를 경동교회로 이끌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세력은 새문안이나 향린같은 교회 울타리 내에 있었다. 조희연, 문성현, 정현경 같은 사람들이 움직이던 때였다. 경동교회에서 김진주는 '젊은 둘째'라는 청년부에서 '루카치'를 읽었다. 숙명여고에서 '데미안'을 읽으며 성장했던 김진주는 뭔가 도움되는 일을 찾고 싶었다. 애쓰는 청년부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사고 싶었다.
그때 청년부 회원이 군대 가면서 향린교회에 다니던 박노해를 소개시켜줬다. 둘이 사귀라는 건지 자신이 제대할 때까지 노동자 청년을 잘 관리(?)하라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첫 만남 장소 '가스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심난했다.
23살 김진주는 덕수궁에서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대한문 앞에서 만나 말없이 오래도록 걸었다. 연록색 은행나무 향이 두 사람을 오가며 말 좀 하라고 보챘다. 봄바람이 저녁 노을을 불러올 때쯤 김진주는 21살 박노해의 얘기에 푹 젖어들었다. 며칠 후 박노해는 김진주에게 '위대한 긍정'을 만나 기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82년 10월 13일 김진주는 집안을 설득해 박노해와 결혼했다. 신혼집은 경기도 안양의 버스 종점. 김진주는 남편의 권고를 받아들여 약사에서 구로공단의 여공이 되었다. 가죽봉제공장 '와이비리상사'에서 본드칠을 하고 망치로 두드리는 시다와 미싱사 일을 5년간 했다. 숨쉬기도 힘들고 손마디가 부르트며 쩍쩍 갈라지는 노동이었다.
백병원에서 약사로 일할 때는 월 30만 원을 받았다. 봉천동에서 잠시 약국을 열었을 때는 항상 손님들로 붐볐다. 구로공단에서는 하루 열두 시간 일해 겨우 6만 원을 받았다. 6년 동안 여공의 처지는 늘 똑같았다.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진주는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그때 남편은 안남운수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운전기사로 승진하기 전 짬이 있었을 때 그는 종일토록 시를 썼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라는 '노동의 새벽' 구절도 이때 쓰여졌다. 버스회사 정비일이 막차가 들어오면 시작해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났던 까닭이다. 박노해는 이런 시를 김진주에게 보여주며 평을 요청했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 숙명여고에서 문학상을 받았던 그에게 여전히 낯선 정서였다.
풀빛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는 수배되었다. 그런데 '노동자' 박노해는 버스회사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파업을 벌였고 수배가 되었다. 결국 이중 수배 처지가 되어 집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김진주도 공장을 나와야 했다.
이후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했고 김진주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박노해와 함께 혁명적 조직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 11월 사노맹 출범에 참여했고 피검되기까지 지하 인쇄소의 책임자이면서 선전업무를 맡아 '노동해방문학'에 '한승호'란 필명으로 고정기고를 했다.
나눔밥상을 차리다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있던 김진주는 새벽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제 장승포에서 지세포로 넘어가는 길, 왼쪽으로는 바다가 일렁이고 그 물결을 헤치며 부산항에서 제주도 가는 뱃길이 분주하다. 그 오른편에 바닷가 앞에서 돌연 솟구친 옥녀봉이 있고 그 중턱에 이진암이 자리하고 있다. 김진주의 고모가 창건한 작은 사찰, 김진주는 박 시인과 함께 '나눔문화운동'을 하다가 2009년 이곳으로 왔다.
박 시인은 경주교도소에서 1998년 석방되자 김진주에게 '나눔문화운동'을 제안했다. 생태재앙·전쟁과 기아·영혼의 상실이 '문명사적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전위운동, 계급운동에서 벗어나 문화와 시민이 중심이 되고,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시민운동, 7년 징역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며 '동지적 동행'을 요청했다.
김진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나눔문화에서 기획위원을 맡았다. 사단법인 설립작업을 하고 회원모집 사업과 포럼 기획을 했다. 처음에는 5~6명이 시작했지만 2008년에 이르러 연구원은 30여 명이 되었고 후원회원도 2000명을 넘어섰다. 김진주가 여기서 특히 노력했던 일은 나눔밥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