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 2000 펜촉 수리 전 02라미 2000 만년필, 추락으로 휜 펜촉 정면 컷
김덕래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변 가까운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또 받으며 삽니다. 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급적 받는 이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해주길 소원합니다. 디지털 디바이스, 신발, 옷, 책, 액세서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지만, 펜을 선물하는 데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쓸 것'을 선물하는 자체가 그렇고, 아날로그 감성영역의 정점이랄 수 있는 만년필은 더욱 그렇습니다.
1960~1970년대 태어난, 지금의 40, 50대들은 졸업선물로 만년필을 받았던 기억이 더러 있을 겁니다. 당시의 만년필은 성공에 대한 축원과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바라는 염원이 어우러진 상징물과도 같았습니다.
졸업식이 있는 날 학교 근처 중국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비록 만년필을 선물 받진 못했지만, 내 기억 속 졸업식은 눈치보지 않고 자장면 곱빼기를 시킬 수 있던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날로 남아 있습니다. 80년대로 넘어가며 손목시계에게 바톤을 넘겨준 만년필은, 마치 구시대의 유물처럼 쓰는 사람들만의 기호품이 되어갔습니다.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만년필, 라미
독일은 누구나 인정하는 필기구 강국입니다. 최고의 만년필로 일컬어지는 마이스터스튁 149를 가진 몽블랑(Montblanc)를 필두로, 149의 강력한 대항마 소베렌 M800을 보유한 펠리칸(Pelikan),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기구 생산업체인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연필로는 파버카스텔에 결코 밀리지 않는 내공과 역사를 가진 종합문구업체 스테들러(Staedtler),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포켓만년필로 대표되는 카웨코(Kaweco), 만년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닙(Nib)과 피드(Feed) 전문 생산업체 중 선봉장인 복(Bock) 등 강력한 업체들이 포진한, 그야말로 만년필계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입니다.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에 의해 워터맨(Waterman)이 생겨난 이래, 조지 섀포드 파카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파카(Parker)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 하는 건 자신감과 소신의 발현으로 읽힙니다.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 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라미(Lamy)는 파카의 판매 담당자였던 요제프 라미에 의해 1930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레진 소재를 주력으로 하는 몽블랑, 펠리칸과 달리 플라스틱과 스틸이라는 하드웨어와 모던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소프트웨어를 결합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