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벽화마을의 '꽃계단'. 기존에 페인트로 그려진 꽃그림 위에 색색의 비정형 타일을 붙여 모자이크 처리한 작품이다.
연합뉴스
그렇게 오랫동안 이화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수완 좋은 누군가는 값을 올려 집을 팔아버리고 떠났다. 요즘에도 이화마을에는 "단독주택 급매 박물관, 전시장, 카페 등 미래유산동네! 5억!"이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휘날린다. 몇십 개의 좁은 시멘트 계단을 매일 올라가야만 했던 이화마을의 주민은 말한다.
"달동네 계단이 아름답다뇨? 매일 여기를 오르락내리락 해보세요! 그런 말이 나오나."
이른바 '달동네'라고 불리는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 몇십 개의 좁고 긴 계단은 아름다울 수 없다. 오직 그 마을에 살지 않은 사람들만이 10평이 안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을 보고 감상에 젖을 수 있고, 가파른 계단 앞에서 웃으며 사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처음 공공미술을 하게 된 계기도 벽화였다. 대학시절 여름농활로 간 농촌에서 처음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낫을 잡고 벼를 베고, 비닐하우스에서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잤다. 농활을 간 미대학생들의 전통은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마을 이장님에게 벽화를 원하는 집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붓과 페인트통을 들고 간 집에는 할머니 혼자 살고 계셨다. 며칠 동안 땡볕 아래서 벽화를 그렸다. 벽화가 완성되던 날, 할머니와 마을사람들을 모시고 벽화 앞에 모여 조촐한 오픈식을 했다. 그런데 벽화의 담벼락 주인인 할머니가 좋아해주실 줄 알았는데 벽화를 보고 훌쩍이는 게 아닌가. '할머니 왜 우세요? 그림이 마음에 안 드세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답했다.
"내 평생 진짜 그림은 처음 봐... 고마워."
예술의 불평등함에 대하여
'진짜 그림'은 처음 본다는 할머니의 말은 내가 서울로 돌아간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후로 미술관에 올 수 있는 사람만 향유하는 미술이 아니라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미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갤러리보다는 거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거리에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나에게 지역 사람들은 커피나 우유를 주며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곤 했다. 어느 날 공공미술을 한다는 나를 보며 한 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강남에 벽화 그리는 거 봤니? 공공미술은 가난한 동네에만 하는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면 달리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 말을 나는 오늘 이화마을을 보며 다시 떠올린다. 이화마을 어느 모퉁이에는 급매 5억이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월세방 보증금 100만 원, 월 13만 원'이라는 벽보가 마주보며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