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지옥

검토 완료

지영석(zikic)등록 2020.01.10 10:26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 

"어이 총각. 나 바빠! 간단한 거니깐 나부터 먼저 해줘."

난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하고 있다. 지금 ATM 앞에서 노인 출금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고객님. 이거 하고 도와드릴게요." 
"아니 난 금방 끝나는데 진짜 답답하네."

중년 손님이 투덜거리며 날 째려본다. 난 노인에게 비밀번호를 눌러 달라고 한다. 화면에 비밀번호가 맞지 않는다는 문구가 나온다.

"어머니. 방금 입력한 비밀번호 다르다고 나와요. 다시 눌러주세요."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이 번호로 계속 써 왔어. 1234번이 맞단 말이야!"

노인은 내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만약 비밀번호 모르면 어머니 본인 카드여야 하고 신분증 지참해서 창구로 가서 재등록하셔야 해요."
 
창구를 쳐다보며 노인이 말한다. 

"저기 아가씨들은 알고 있을 거야. 저기 가서 비밀번호 물어봐야겠다." 

내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은 듯한 반응이다.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직원들도 몰라요. 비밀번호 모르시면 재등록하시는 방법밖에 없어요."

중년 손님이 또 옆구리를 찌른다. 

"아직 멀었어! 나 장사하러 가야 해!"
"뭐가 틀렸다는 거야! 비밀번호 1234번을 내가 몇 년을 썼는데!"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영혼을 간신히 잡는다.
 
"고객님 좀 기다리세요. 카드 어머니 것이에요? 신분증 가지고 오셨으면 창구에서 비밀번호 재등록하세요." 
"비켜봐. 한 번 더 눌러보게."

화면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을 치우며 말한다. 아직 카드도 안 넣은 상태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검지를 들고 화면이 뚫릴 듯이 쳐다본다. "한 번 더 틀리면 비밀번호 재등록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노인의 신경은 온통 비밀번호 누르는 데 혈안 돼 있다. 결국 세 번 틀렸다.

"비밀번호 재등록해야 해요. 신분증 있죠? 번호표 드릴게요. 창구직원에게 비밀번호 재등록해야 한다고 말하세요." 

노인에게 번호표를 주고 중년 손님을 쳐다봤다. 중년 손님은 팔짱을 끼고 날 째려보고 있다. 내 몸이 한 개라서 미안하다. 최대한 한숨을 크게 내쉬고 침착하게 말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시장 안에 은행이 있다. 평균 번호표 150번은 그냥 넘는다. 그뿐 아니라 와서 쉬다가는 손님, 커피 뽑아먹는 손님, ATM 이용하는 손님 등을 합치면 250명 이상은 오는 것 같다. 

여기 손님들은 항상 조급하다. 번호표 안 뽑고 그냥 창구로 직진하는 손님들이 다수이며, 절차가 있는데 그런 거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한다. 한 명에게 휩쓸리면 걷잡을 수 없다. 난 친절보다는 냉정함을 택했다. 친절하다가는 이 사람들의 무례함에 내 분노가 터질 수도 있다.

동전 입금해달라는 손님이다. 동전은 내가 세고 창구에서 입금한다. 종류별로 바구니에 담는데 담을 바구니가 부족해서 50원과 10원을 한꺼번에 담았다. 직원이 내게 말한다.

"동전 분류할 때 바구니를 제대로 사용하세요. 지금 섞여서 확인이 어렵잖아요. 바구니가 없으면 없다고 얘기하세요."

불현듯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아직도 찍네...' 난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간다. 밖으로 나가 벽을 주먹으로 마구 쳐댄다. 돌아와서 손님을 도와주는데 손님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기 손에서 피나는데 괜찮으세요?"

오후 3시 30분. 마감 전. 미리 공과금 용지만 빼놓는다. 그런데 실수로 공과금 마감을 했다. 당황해서 밖으로 빠져나가 흡연을 한다. 분명히 내게 뭐라고 한 소리 할 것이다. 담배를 깊이 흡입하며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답답하네 진짜! 이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그때 또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 배 안쪽에서 뜨겁게 올라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퍼져있다. 내가 일부러 그랬어? 내가 일부러 마감해서 너희에게 피해주려고 하는 거야? 아니잖아. 공과금 담당자에게 가면서 생각한다. 뭐라고 하기만 해 봐 뭐라고 하기만 해 봐. 보이는 물건들 다 때려 부숴 버릴 테니깐. 인상을 한껏 찌푸린 상태에서 말한다.

"계장님. 제가 이거 모르고 마감했는데 어떡하죠?" 

말해. 답답하다고 왜 그랬냐고 말해. 말해. 말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게 말해. 

"아. 그럼 우선 나온 명세표 주시고 오후 4시에 한 번 더 마감해주세요." 

별문제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직원. 명세표를 주고 내 자리로 돌아온다. 깊은 안도와 허무함에 컵에 꽉 차 있던 물을 한 번에 들이킨다.

1년 전.

"야. 지민이 걔는 진짜 얼마나 답답하던지. 아이스크림을 하루 온종일 찍고 있더라."

재고조사 일한 지 10일째. 경력이 가장 낮은 사람이 뒷좌석에 앉고 팀장과 부사수가 앞에 앉는다. 하는 일은 편의점에 가서 PDA로 상품을 스캔해 실제재고와 프로그램에 입력된 재고가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난 차 뒷좌석에 있다. 눈은 휴대전화를 보고 있지만 온 신경은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다. 일은 한 조가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작위로 조를 편성했다. 일주일 스케줄표를 메일로 보내줬다. 

일을 못 하면 입소문은 금방 퍼졌다. 여기는 일 못 하는 사람 인격을 무시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한번은 이런 얘기도 들었다.

"야. 내가 너무 답답해서 지민이에게 너 여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그만두라고 말했어. 그러니깐 실실 쪼개기만 하더라 그 새끼."
 
그 얘기를 들으며 드는 생각했다. 있었다. 나도 일 못하면 인격적으로 무시당해도 되는 존재가 되겠구나. 나도 지민씨처럼 저렇게 욕을 먹겠구나. 실제 내가 만난 지민씨는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잘 가르쳐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실수도 많이 해 팀장에게 혼났지만 그렇게까지 혼날일인가 싶은 경우가 많았다. 

지민씨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웠지만 그보다 지민씨처럼 되기 싫은 내가 훨씬 더 미웠다. 난 도마 위에 있는 듯 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휴대전화 메모장으로 들어가 내려서 해야할 일들을 적었다. 

내리자마자 노트북을 챙기고 포스트잇에 테이프를 붙여 PDA에 붙인다. 빠르고 신속하게 해야한다. PDA시간을 확인한다. 모든 오감을 동원해 죽기살기로 빠르고 정확하게 찍는다. 실수는 내 인격을 무시해도 되는 승인이었다.
 
내가 뭘 찍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엄청나게 빨리 찍었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빨리 찍어서 나 자신도 놀라웠다. 이제 한 매대만 끝내면 된다. 몸을 일으켜 매대를 보는데 그때 알았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다 찍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한 직원이 내가 찍는 것을 도와준다. 도와주고 있는 직원 뒤에 팀장이 아주 작게 말했다. 

"아직도 찍네." 

들릴까 말까한 작은 소리에 내 얼굴은 달아올랐다. 큰일났다. 지민씨가 되면 안돼. 지민씨가 되면 안 된단 말이다. 1분 준다. 1분 안에 못하면 난 쓰레기다. 난 쓰레기다.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1분 안에 끝내라.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어떻게든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다음날. 가장 화를 잘 낸다는 팀장과 같이 갔다. 그날은 상품이 많은 편의점이었다. 매장에 있는 물건들을 다 찍고 창고에서 물건을 찍었다. 쌓여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나는 안쪽에 있는 것을 꺼내놓기 위해서 물건을 옆으로 살짝 치웠다. 

"카미씨. 물건 바닥에 내려놓고 안에 있는거 꺼내세요."

나는 바닥에 내려놓으라는 물건을 착각해서 다른 물건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랬더니 높이 쌓여있던 물건들이 다 쏟아졌다. 

"답답하네 진짜!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내가 말했잖아!"

창고에 있음에도 바깥에 모든 손님이 놀랄 만큼 큰 목소리. 내 손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쏟아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둔다. 덤덤한 척 해야해. 덤덤한 척 해야해. 여기서 당황하면 난 끝장이야. 난 최대한 신속하게 정리하고 나갔다. 편의점 점주에게 인사를 하는데 당황하며 내게 90도로 인사했다. 점주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집에 도착했다. 담배를 피우며 메일에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내일도 화를 잘 내는 팀장과 같은 팀이다. 도저히 출근할 자신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트였다. 도마 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정이 생겨서 출근 못할 것 같습니다.' 인사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운전하는 팀장의 뒷통수를 PDA로 내려치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재고조사 아르바이트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후 상실감이 컸다. 상처는 내 마음이 열리는 것은 막았다. 마음을 닫아 혼자 있는 것은 견딜 수 있었으나 배고픔은 견디지 못 했다. 면접을 몇 군데 봤지만 떨어졌다. 쌓여가는 빚과 월세, 배고픔이 내게 정장을 입히고 면접을 보게 했다. 면접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웃는 거 하고 밝은 척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겨우 합격한 곳이 재고조사 아르바이트였다.

현재. 현재는 내가 가장 오래 한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고 있다. 일한 경력이 나름 되다보니 일할 수 있었고, 재고조사와는 다르게 익숙한 일이라서 그런지 빠르게 처리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손님들의 무례함에는 익숙해지지 않아 웃지 않는 날이 많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한다. 어제 옆구리를 찌른 사람이 생각난다. 옆구리를 찌르고 답답하다는 듯 날 쳐다보는 그 표정. 누운 상태에서 벌떡 일어난다. 냉장고에 있는 물을 마신다. 그 사람을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한소리 하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민다. 출근하기 싫다. 출근하기 싫다. 물을 몇 모금 더 마시고 옷장 앞으로 간다. 내가 붙인 서류들을 천천히 읽는다.

'채무내역
연체 최초일. 원금:725,410원 수수료:14,616원 총 합계금액:818,308원
향후 정상적인 회수가 불가하다 판단되어 법원소송과 집행등의 절차를 통해 채권을 확보하고자 실사 방문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그때로 돌아갈수는 없다. 함부로 옆구리를 찌르는 무례함보다 배고픈 상태로 정장을 입고 밝은 척 면접보는게 더 싫다. 회사 지옥, 빚 지옥중 택하라면 난 회사지옥을 택하겠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