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천 가족이 폭격당한 단양군 가곡면 여의곡리 양지마을
박만순
"여가 그 자리입니다." 해발 500미터에 위치한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양지말 개울가에 멈춰 선 조윤야(82,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는 68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여기가 이재천씨 가족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한 곳이에요."
6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산촌지역의 길은 확장됐고 냇가에 있던 바위가 잘려나갔다. 양지마을 이재천 일가가 미군의 폭격을 피해 바위 밑에 숨었다가, 물을 먹으러 나온 사이에 기총소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재천의 아내, 아들, 딸이 즉사하고, 딸 둘은 각각 엉덩이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재천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1951년 2월 장티푸스로 인해 죽은 30명이 매장된 곳을 안내하기 위해 걷던 조윤야는 기자에게 또 한 곳의 위치를 손짓했다. "여기가 오빠와 내가 미군에게 죽을 뻔했던 곳이에요" 한드미동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성래가 연일 계속되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여동생과 방공호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 조명석은 장티푸스에 걸린 아내 이성명을 지게에 지고 아랫마을로 내려간 상태였다.
조윤야(당시 14세)는 좁쌀을 머리에 이고, 오빠 조성래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군에 조성래 남매는 얼어붙었다. 잔뜩 긴장한 오빠가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여동생 조윤야는 순간 "오빠 손들엇"하며 외쳤다. 웬지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성래는 이불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조성래 남매 일행을 본 미군은 통역을 통해 "아래 마을로 내려 가"라고 했다. 우물쭈물했다가는 미군의 총질에 저 세상으로 갔을 뻔한 상황이었다.
1951년 1월 초 미군에 의해 충북 단양군 가곡면 여의곡리에 가해진 초토화 작전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폭격과 포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5명에 그쳤지만, 대부분 가옥이 불에 타고 전염병으로 약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윤야는 말한다. "당시 어머니 있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폭격 후에 사람들은 살 곳이 없어 솔가지를 잘라다가 임시 집을 만들어 살았어요." 움막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곳에서 한겨울을 보낸 것이다.
동굴만이 진실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