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 ‘벽수거사정도’ 작품
고은솔
벽동에 있던 윤덕영의 집은 매우 규모가 크고 조경이 특별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집은 지금의 사간동 오른 쪽 벽동에 있었는데, 송현 고개를 옆으로 두고 있어 경관이 빼어났다. 집은 큰 기와집이었으며 정원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뜰 한 가운데는 커다란 노송과 은행나무가 있고, 그 사이에 오동나무가 있고 이어 버드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 온통 나무와 꽃들과 기이한 화초가 줄지어 있었다.
뒤편으로는 백악산과 인왕산이 보이고, 그곳은 성곽으로 둘러있고, 멀리로는 한강이 바라보이는 남향의 별세계 같은 곳이었다. 계절에 따라 온갖 꽃들이 피는 별세계 같은 집이다. 특히 뜰 한쪽에는 새로이 작은 산(假山)을 쌓아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세웠는데, 산에는 작은 소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이러한 조경은 당시 한국에는 거의 없는 특별한 방식이었다.
윤덕영의 '벽수(碧樹)'라는 호는 아름다운 윤덕영의 집을 생각하여 순종이 '벽동(碧)의 나무(樹) 많은 곳에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내린 호이다. 어느 날 순종은 '벽수거사정(碧樹居士亭)'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현판을 만들어 윤덕영에게 보낸다. 이에 감읍한 윤덕영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에게 집 주변 풍경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안중식은 직접 윤덕영의 집을 찾아 스케치 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단에 옮겨 그림을 완성한다.
또한 늘 존경해오던 문인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는 이 정자에 관한 글을 짓게 하고,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1842-?)에게는 글씨를 쓰게 한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과 글은 따로 보관되어 오다가 비단에 그린 그림이 습기에 훼손되자 더 이상 망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두루마리 축권(軸卷)으로 꾸며진다.
이 작품은 친일파 윤덕영의 부탁으로 그의 집을 그린 불순한 면이 있으나 안중식의 그림으로는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더욱이 초본까지 함께 남아 있어 관심을 끄는데, 수정한 흔적까지 있어 안중식이 사생하며 느낀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은 실제 작품에 반영되어 있어, 회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 그림은 당시 지배층들의 삶의 모습이나 건축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실제 거주하던 집의 구조를 알 수 있고, 정원의 구성 양식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벽수거사정도'에는 집 주변에 새로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인 '가산(假山)'을 만든 모습이 나온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건축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매우 새로운 모습이라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윤덕영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부를 유지해, 1935년에는 옥인동에 프랑스식 저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어 '한국의 아방궁'이란 빈정거림을 당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윤덕영은 국민들의 어려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 불리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윤덕영도 결국 일본의 교토에서 창설된 '대본교(大本敎)'에 빠져 조선 지부를 만들려 하였고, 말년에는 중국에서 창시된 사이비 조직인 '홍만자회(紅卍字會)'의 조선 지부를 만드는 등 혼란스러운 인생을 살다 인생을 마친다.
세월이 흘러 결국 윤덕영이 젊은 시절 살며 가꾸었던 벽동 집도 정치적 변화에 따라 없어지고, 말년에 지은 화려한 옥인동 집 또한 원인모를 화재에 불타 없어진다. 이를 보면 나라를 팔아가며까지 쌓은 '권력(權力)'과 '부(富)'라는 허상은 결국 '화마(火魔) 후의 재'같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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