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박만순
양춘영의 남편 정순종이 4.3 이후 산 사람들 대열에 합류했거나 무슨 협조를 한 것도 아니었다. 경찰들이 제주도 중산간 마을 청·장년들을 보이는 즉시 학살하자 피신했을 뿐이다. 제주군경은 4.3이 발발하자 해안가에서 5km 이상의 마을은 중산간마을로 규정하고 무조건 해안가로 소개(疏開)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해안가로 이사한다고 해서 생활할 주거공간이 확보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경작할 밭이 없기에 이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군경은 이런 실정은 외면한 채, 소개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규정하고, 그 사람의 집을 불태워 버리고, 청·장년들은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종이 마을 사람에게 빚을 갚으려고 출타한 사이에 아내가 지서에 끌려가자, 그는 한라산으로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마을에 있다가는 언제 화를 입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찰들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선무작전에 정순종은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주정공장에 구금된 그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들은 모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9년 봄이었다. 1년여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순종은 대덕군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경찰들의 살기를 피해다니기에 급급했던 그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최후였다.
음식물 찌꺼기 얻어다 먹어
12일간에 걸친 경찰들의 고문 끝에 보리밭에 버려진 양춘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과 학생연맹 소속 학생들은 그녀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보리밭에 버렸다. 그런데 보리밭을 지나가던 마을사람 눈에 그녀가 눈에 띄었다.
"문현이 엄마 정신 차려봐." 그녀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마을 아낙은 옆집 아줌마를 데리고 와 양춘영을 집으로 업고 왔다. 물을 먹이고 온 몸을 한참 주무르자 정신이 되살아났다. 그제서야 마을 아낙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니 양춘영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옷은 걸레처럼 찢겨나간 것이 보였다. "사람을 어떻게 이리 만들었을까"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시아버지와 시숙은 마을 냇가에서 학살되고 남편은 행방불명된 상황에서 그녀는 참담했지만 기운을 내야했다.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천포에 있는 전분공장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얻어다 먹었다. 양춘영은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얻어 오거나 싼 값에 사왔다. 나무 이파리를 뜯어 오기도 하고, 밀기울을 사오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어린 아들 정문현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영양실조였다.
당시는 마을에 품팔이 할 일거리도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빨갱이 가족'에게 일거리를 주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시대였다. 집도 불에 타 없어져 남의 집 담 옆에 임시 움막을 쳤다. 사실 움막이랄 것도 없었다. 담 옆에 나무를 세워놓고 갈대를 씌웠다. 문은 가마니를 걸쳐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임시움막이 날아갔다.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줄줄 새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사실 거지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마냥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양춘영은 나무그릇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떼다가 행상 길에 나섰다. 그녀는 걸어서 서귀포 곳곳의 마을을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한 번 나가면 4박5일 일정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면 아들 정문현은 혼자 지내야 했다.
그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서 나무 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다. 성산포나 모슬포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팔기도 했다. 쥐꼬리만한 돈으로 곡식과 고구마를 사와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군경유족회와 화합 이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