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 그리고 누군가를 위한 호두과자

[서평] 크리스티나 진 <달콤한 호두과자>, 열 네살 마로가 전해주는 달콤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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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영(omysun3)등록 2019.12.05 10:59
자투리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호두과자를 집어들듯 가볍게 <달콤한 호두과자>를 펼쳐 들었다.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제목을 가진 예쁘장한 작은 책이었다. 다 읽은 후 느껴지는, 갓 꺼낸 호두과자를 받아든 듯한 이 따뜻함. 아귀라곤 통 맞지 않는 자투리들의 달그락거림을 잠재우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용액이 마음 속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크리스티나 진의 <달콤한 호두과자>는 호두과자 레시피와 관련된 5개의 에피소드가 모여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저 먼 나라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에피소드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호두나무 길을 지나 만나는 유럽의 낭만적인 전원 마을, 형상을 알 수 없는 괴물 빅풋이 두려운, 휴대폰과 SNS나 택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 손님의 주문과 취향대로 만들어지는 호두과자, 엄마를 도와 호두과자 가게를 꾸려 나가는 마로.
 

크리스티나 진 <달콤한 호두과자> 표지 ⓒ 예담

 
이중 가장 비현실적인 것은 '엄마를 돕는' 마로이다. 아빠가 없는 마로는 호두과자 가게를 운영하는 엄마를 도와 반죽을 담당하고 있다. 여전히 숲 속의 빅풋이 두렵고,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열 네살 마로이지만, 버젓이 생계의 한 축의 담당하고 있다. 열 네살 마로는 순진하지만 어른스럽다.

이런 '열 네살'은 꿈 속에서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사춘기를 맞이할 나이인 열 네살 마로가 엄마를 대하는 '순종적'인 태도는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마로에게는 아빠가 없다.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더 엄마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엄마를 향한 마로의 순종적인 태도는 책에 소개되는 그 어떤 호두과자 보다도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물론 표현하지 않을 뿐, 마로에게 엄마와 상황에 대한 불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마로는 그저 속엣말로 조용히 궁시렁거리지만, 때론 폭발하듯 터트리기도 한다. 
 
"신이 공평하다면 왜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하는 거야?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엄마랑 내가 밤늦도록 밀가루를 치대며 호두과자를 만들지 않아도 되잖아! 별이 총총하게 씹히는 맛 따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저 별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나도 캐러멜 자갈이나 찾으러 가는 게 낫겠어!"

                                         크리스티나 진 <달콤한 호두과자> 144쪽 발췌

마로에게 아빠는 없지만, 생각만으로 힘이 되는 아빠와의 추억은 건재하다. 홀로 남을 마로를 향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의 묵묵한 사랑은 안타깝다. 아빠가 심은 호두나무, 엄마와 만드는 호두과자, 호두가 매개된 마로의 가족들은 무척이나 끈끈하다. 그 끈끈함을 만든 사랑이 마로를 키운다. 그 사랑은 마로로 하여금 삶의 도전에 기꺼이 응하게 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도록 한다. 가족의 힘이며, 그 안에 응축된 사랑의 힘이다.

안타깝게도, 가족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이러한 응축된 사랑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사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혈연에 기초한 본능적인 사랑일지라도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각자의 삶을 살기 바쁜 현대의 가족은 그러한 사랑을 키워내기가 쉽지 않다.

부모와 함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긴밀하게 연결된 시간이 지금의 부모와 아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함께할 수 없는 각자의 의무를 다한 후 남는 시간은 휴대폰에게 돌아간다. 각자에서 시작해 각자에서 끝나는 시간들 속에서 마로와 엄마, 마로와 아빠, 마로의 엄마·아빠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함이 제대로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부모도 아이들도 바쁘기 마련이며, 휴식을 위해서 남는 시간에는 마주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현대의 가족은 서로를 보듬으며 웃기 보다는 '따로국밥'이 편한 짜증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속을 감추고 겉돌지만 한 집에는 모여 사는 사람들이 오늘의 '가족'이다. 그 안에서 응축되는 것은 혼자가 주는 편안함일 것이다.
 
가정 안에서 사랑과 안식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부모들은 공허하고 메마른 정서를 적셔줄 대체물을 만나기 쉽지 않다. 애초부터 충분한 애정의 수분을 공급받지 못한 사람을 늘 목마르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 갈증이 고통스러워 더 혼자가 되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

좀더 잘 사기 위해 바빠지면서 그렇게 모두는 좀더 외로워졌다. 마로가, 그리고 마로 가족의 일상이 그토록 뭉클한 것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만큼이나 따뜻한 안식처로 느끼고 싶은 가족에 대한 절실한 소망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 제대로 충족받지 못했던 그 절실한 소망이 만들어낸 '외로움'을 마로는 가만히 다독인다. 마로는 까다로운 주문에 투덜거리지만 성심껏 호두과자를 굽는다. 달콤한 호두과자 하나를 깨무는 그 순간을 위해 마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여 삶의 한 순간이 달콤해진다.

마로가 만든 '달콤한 호두과자'는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과 딸·아들에 대한 실망스런 감정들을 물처럼 흘러보내라고 조언한다.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며 지금의 '나'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하지 않았던 때론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들에 각인된 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이다. 모두들 사랑하지 않아 그리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건지 몰랐던 것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 깊숙이 상처를 갖고 있어요. 고통의 신맛이 나는 상처죠. 그걸 잊으려고 달콤한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찾게 된답니다. 저희 네 자매처럼요."

                                 크리스티나 진 <달콤한 호두과자> 157-158쪽 발췌

마로는 호두과자를 만들 때마다 그 호두과자를 먹을 누군가를 생각한다. 때문에 목차에 적힌 다섯 가지의 호두과자들은 모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호두과자에 대한 마로의 장인정신은 엄마와 아빠로부터 받은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랑도 받은 사람이 줄 줄 안다고, 마로는 '진심'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된다. 엄마와 아빠가 준 사랑에 담긴 진심으로 마로는 애정이 담긴 호두과자를 만들 수 있는 '어른'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호두과자를 받아보지 못했다 한들, 받아보지 못했다 착각했다 한들,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충분히 주고 받았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충분하지 못하였다 하여 계속 충분하지 못한 상태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받지 못한 서운함을 먼저 버리지 않는 한, 갈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마로는, 마로의 호두과자는 먼저 그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따뜻하면서도 달콤한 위로를 전한다.
 
눈을 떴다. 멀리 구름이 걷힌 자리에 '달콤한 호두과자'의 빨간 지붕이 보였다.

                크리스티나 진 <달콤한 호두과자> 196쪽 '마지막 문장' 발췌
 
<달콤한 호두과자>는 아름다운 비법이 담긴 이야기였다. '나' 자신이기도 할 그대여, 호두과자를 만들 시기임에도 누군가가 전해줄 호두과자만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그만 안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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