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하루

가족여행 중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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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철(drmir)등록 2019.11.22 16:46
                                     선물 같은 하루
 
                                                                               임용철
 
오늘 아침 경인고속도로 출근길에서 졸음운전 예방을 위한 고속도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힘들 땐 쉬어가세요.'
대한민국은 유치원생부터 은퇴한 노인까지 여유 있는 세대가 없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봐도, 학원 쉬는 날이 휴일이 돼버린 나의 아이들도, 그리고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며 자식들 먹거리를 챙기시는 우리 어머니를 봬도 그렇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인천 방향 외곽순환도로 출근길에 서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문화사가 하위징아는 그의 책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인간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았다. 그에 말에 따르면 나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호모 파베르에 해당한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하루하루가 그날 같은 치과의사로서 일상을 보내는 나는 '놀이하는 인간'이란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특별한 사건들이 없는 일상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짝하고 빛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어느 해인가 인천치과의사신협에서 조합원들을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초대한 이벤트도 있었다. 그 여름 바닷가의 기억을 소환해본다.
 
넓은 백사장이 매력적인 을왕리해수욕장은 서울에서 이용하기 좋은 해수욕장이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차들만 우글거리는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바다가 보이자 아내도 아이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을왕리해수욕장에 도착해보니 패러세일링이 멀리 하늘을 날고 요트와 카약은 여유롭게 물 위를 떠다니고, 스피드보트와 바나나보트, 제트스키가 여름 바다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백사장에는 파라솔들 뒤로 많은 텐트가 영역표시를 하며 줄지어 있었다. 신협 직원분들이 미리 설치해놓은 천막 아래에 우리 가족도 가져온 매트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눈에 띄는 대학동문 선후배 가족들이 보여서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안부 인사도 나눴다.
신협에서 준비한 그 날의 이벤트는 각종 해양 액티비티 무료체험, 맛있는 점심, 전기구이통닭과 맥주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 무한제공이었다.
천국이란 이런 곳이 아닐까. 풍성한 먹거리와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 액티비티를 체험하며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 비명,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빠 엄마 미소들이 해변에 넘실대고 있었다.

해변에서 다양하게 체험하는 액티비티는 안전요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줘서 이용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문제는 내가 겁이 많다는 데 있었다. 어느 정도 겁이 많냐면, 아들과 단둘이 도쿄 디즈니랜드에 패키지여행 갔을 때 해리포터 관에서 타게 된 놀이기구가 너무 무서워서 나란히 놀이기구를 타진 못했으니 말이다. 마침 무섭다고 울면서 타기를 거부하는 일행의 아이를 내가 달래는 사이, 우리 아들은 울고 있는 아이의 아빠와 놀이기구를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왜 놀이동산만 가면 재밌는 놀이기구 놔두고 아빠는 범퍼카만 그렇게 열심히 타려고 해?"
큰 딸아이는 놀이동산에 가면 재밌는 놀이기구를 아빠가 함께 타주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아빠는 후룸라이드만 타도 무서운 걸 어쩌니.

치맥에 취해 잠시 두려움을 잊은 나는 가족들과 스피드보트를 타게 되었다. 스피드 보트가 바닷가에서 멀어지면서 속도를 내자 안전요원은 점점 보트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탑승자들에게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보트의 기울어진 쪽에 타고 있던 나는 금방이라도 보트에서 떨어져 나갈 거 같은 두려움에 떨며 안전요원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무서워서 인제 그만 타고 싶어요'.
내 눈빛에서 두려움을 읽었는지 아니면 이제 체험을 끝날 때가 돼서인지 안전요원은 그제야 보트의 경사를 줄이고 속도를 늦추면서 다시 바닷가로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그제야 내 마음에도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십년감수했다.

재미에 푹 빠져 놀다 보면 어찌나 시간이 금세 흘러가는지, 어느덧 해수욕장에 낙조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남매는 여전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약의 노를 젓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노을이 지는 해변을 따라 거닐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서로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순간들을, 지금까지 가족들이 건강하게 살아온 시간에 대해 서로 감사하고 고마움을 나누었다. 일상에 쫓기며 긴장해있던 마음의 근육들이 여유로워지고 단단해졌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족여행 중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더니, 종일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놀다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 들리면 아무 때나 뷔페식당에 들러 맛있게 음식을 먹었던 여행이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놀이의 즐거움에 푹 빠져 살아가고 싶어 한다.
하상욱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지지 않는 것보다 지치지 않는 삶이 더 중요한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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