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집터(오른쪽 붉은 간판 건물)
조종안
약산 김원봉 집터는 남안구 탄자석 대불단정가에 있었다. 이곳은 의열단 의백,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광복군 1지대 지대장 겸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지낸 약산이 1940년부터 광복이 되는 1945년까지 거주했던 건물이다. 이날은 신발가게로 사용되고 있었다.
김종훈 기자에 따르면 본래 자그만 집을 2층 시멘트 건물로 개조 복원해서 약산이 살았던 당시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구부러진 길로 한참 들어가니 시장 골목이 시작된다. 과일, 떡 등 먹을거리 노점상이 즐비하다. 상인들의 호객행위가 귀를 따갑게 한다. 확성기에 대고 열심히 말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지 더욱 시끄럽게 느껴진다.
"이 건물이 약산 김원봉 장군이 5년 동안 살았던 집입니다. 오랫동안 약방으로 쓰이다가 2016년경 과일 집이었고, 작년에 왔을 때는 폐업 중인 옷가게였어요. 그런데 또 신발가게로 바뀌었네요. 작년 옷가게 주인은 이곳에 누가 살았는지 알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약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묻고 하니까 알았던 거죠. 과일가게 주인도 알았다고 그래요. 김원봉 이름은 몰랐지만 독립 영웅이 살았다는 것은 알았다는 거죠.
약산은 이곳에서 좌우합작도 이뤘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결과도 만들어냈고 아내 박차정 여사가 돌아가신 곳도 이곳이고, 재혼한 곳도 이곳입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은 곳도 이곳입니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만들어놓은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자리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어요. 여기에서 그곳으로 출퇴근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도로로 바뀌어 확인할 수 없네요."
약산이 출퇴근했다는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자리. 그곳 '손가화원'에는 1935년 난징에서 약산 김원봉의 주도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이 있었다. 건너편에는 화상산(한국인 공동묘지)이 자리하였다. 또한 약산의 집터와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주소가 '남안구 탄자석'으로 검색되는 것으로 미뤄 두 곳이 한동네, 즉 지척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약산이 거주했던 집터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섯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청년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인물로 백범보다 많은 현상금이 내걸렸던 김원봉, 그의 흔적은 상하이에도 항주에도 난징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신발가게가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서조차 그 흔한 표지석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김종훈 기자는 "여러분 많이 헛헛하셨죠. 마지막 코스에서 헛헛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일행은 우렁찬 박수와 격려로 화답했고, '임정로드 4000km 완주!'를 외치며 자축하였다. 이어 충칭 상징요리 '훠궈'를 맛본 뒤 화려한 야경과 전통 야시장을 돌아보고 숙소로 방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