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관 본점 사진 엽서.
황정수
안순환은 영남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노력하여 몇 년은 머슴으로, 또 몇 년은 음식점 조수로 지내는 등 온갖 험한 일들을 겪으며 음식에 관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이후 궁에 들어가 음식 일에 관여하며 음식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궁중에서 일상적인 음식의 조리는 상궁들이 주로 하였지만, 환갑연이나 고희연과 같은 잔치를 할 때나 연향을 베풀 때에는 전문적인 남성 주방장인 숙수(熟手)를 불러 일을 맡겼다. 숙수 중에서 궁중에 전속되어 궁중의 연향요리를 도맡아 하던 이들을 '대령숙수(待令熟手)'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령숙수가 바로 안순환이었다.
안순환은 궁내부 전선사(典膳司)에서 내외 소주방의 주방 상궁들과 대령숙수들을 관리하였고, 공물 또는 진상의 형태로 궁중에 들어오는 진상품을 관리하는 일체의 일을 모두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고,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전선사는 인원을 대폭 감축하고, 1907년이 되자 총독부는 궁내부를 아예 없애버린다.
안순환은 정3품인 이왕직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스스로 궁에서 물러나온다. 안순환은 대궐을 나오며 궁의 음식을 마련하던 숙수들을 끌어 모아, 1909년 현재의 동아일보 자리인 '황토마루'에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조선 궁중 요릿집을 연다. 그동안 궁중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궁중 요리를 일반인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당시 고관대작들은 외국의 공사관들과의 만남을 위해 출입하던 곳은 주로 청요리집이나 일식집이었다. 그런데 우수한 조선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요릿집, 게다가 궁중 요리를 하는 집이 생겼으니 많은 사람이 찾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까지 명월관으로 모여 들면서 안순환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명월관의 명물 예술 기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