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사진남산초등학교 2회 졸업사진. 좌측에 큰 사진이 강영모. 공주에서 교사교육을 받느라 졸업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박만순
북한군이 후퇴할 당시에 3.8선 못 미쳐 장암면의 세 청년은 '북이냐, 남이냐'의 기로에 섰다. 강영모가 입을 열었다. "북에 가봐야 별 볼일 없고, 남에 가 봐야 죽을 게 뻔하다. 여기서 모두 죽자"며 총을 들었다. 서로 총을 쏴 함께 죽자는 것이었다. 강은모는 아버지가 예비검속으로 학살을 당했고, 자기도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으니 남한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같이 있던 강석우(장암면 장하리)가 반기를 들었다.
"왜 자살 혀! 난 그렇게 못하겄네"라고 했다. 결국 그들은 북한으로 올라가 강은모는 평양에서 살고, 강석우는 강원도에서 지냈다. 이는 '제3차 남북이산가족찾기' 때 북에 살던 강석우가 남한의 강내구를 상봉해 전해 준 이야기다.
죽지 못해 산 삶
가장 강태구가 학살되고 장남 강영모가 의용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자, 강은모는 18세에 가장이 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본인을 포함한 7남매, 즉 아홉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집안에는 논도 밭도 없었다. 봄에는 쑥과 무궁화 이파리를 뜯어 끓여 먹었다. 겨울에는 감자가 주식이었다. 부여 금강 너머의 들에 버려진 음식쓰레기를 주워다 먹기도 했다. 걸인이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산 삶'이었다.
마을 뒷산은 민둥산이라 비만 오면 논밭이 산 흙으로 덮였다. 마을에서 가장 여유가 있던 강석기씨 논밭이 망가지면 강은모 식구들의 뱃구레가 기지개를 켠다. 그 논밭에 가서 여름 내내 흙을 져 나르는 일을 해, 하루 품삯으로 쌀 한 되박을 얻는다. 그 쌀로 며칠을 견뎌내는 것이다.
장암면의 구렁개펄에서도 식량 아닌 식량을 얻었다. 그곳에는 참외밭이 있었는데, 넝쿨 깎는 일을 해주면 하루 품삯으로 파란 참외를 준다. 파란 참외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것으로 주로 장아찌를 담아 먹는 것이다. 그런 참외를 얻어 와 아홉 식구가 허기를 달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칠남매 중 막내만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병사계에서 영장이 날라 왔다. 하지만 강은모가 군대에 가면, 남은 식구는 굶어 죽을 판이었다. 부여군 입대자들을 모아 충남 예산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이면 기차 타고 훈련소를 가야 했다.
열차에 타기 전 어느 학교에서 최종 신체검사가 실시되었다. 강은모는 꾀를 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척 하기로 했다. 군의관이 묻는 말에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원래 귀가 안 좋아, 당시 귀에서 짓물이 나왔었다. "야 임마 가." 군의관의 말에 '얼싸 좋다'며 되돌아서면 귀가 들린다는 것이 들통나고 만다. 그는 못 들은 척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군의관이 화를 내며 "야 임마. 가라고"하며 그의 등을 밀쳤다. 그제서야 강은모는 신체검사장을 나왔다.
"죽기 전에 형님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