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양조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누룩들.
막걸리학교
누룩을 단단히 잘 디뎌야 술맛이 좋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1392년 조선 개국과 함께 강릉 태수를 지냈던 조운흘(1332~1404)의 집안 술이 맛있었던가 봅니다. 그 술을 맛보러 손님이 많이 찾아와 집안사람들이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조운흘은 하인에서 누룩을 살살 딛으라고 했고, 그 뒤로 술맛이 옅어지고 시어져서 손님들이 줄어들었답니다. 누룩은 발로 단단히 디뎌야 한다니, 누룩의 어원이 누르기를 잘 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통 누룩이라 한다면 대개가 단단하게 뭉쳐서 만든 밀누룩을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이 누룩을 썼고, 이를 통해서 많은 술들이 빚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종로에는 은국전(銀麯廛)이라는 누룩 가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누룩이 근현대에 들어 양조 산업과 순탄하게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흑국균이 들어와서 소주용 누룩을 대체했습니다.
누룩 제조장이 많았을 때는 1919년에 25,907개, 1925년에 36,273개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근거리 양조장이나 자가 양조용으로 공급됐겠지만 누룩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제조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정책 변화로 누룩제조장이 급격히 줄어들어 1929년에 1,373개, 1930년에 483개가 되었습니다. 해방된 뒤로 1960년대에는 원조 밀가루로 술을 빚게 강제하면서 백국균을 파종한 밀가루 누룩이 전통 밀누룩을 밀어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연구 노력이 부족하다보니, 외래의 기법에 밀려나게 된 것이지요.
21세기까지 간신히 살아 넘어온 누룩 제조장은 경상남도 진주곡자와 광주광역시의 송학곡자 두 군데 정도입니다. 그러니 "전통 누룩은 박물관에나 보내야 해!"라고 비아냥거려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누룩이 발전하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누룩이 못나서가 아니고, 이를 연구 분석하고 활용할 방법을 과학적으로 조직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누룩을 연구할 시점에, 간편한 일본 스타일의 누룩들이 정략적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는 수입 밀이 들어오면서 우리 밀을 찾기 어렵게 된 현실과 흡사합니다. 우리 문화든 우리 음식이든 연구하고 개발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 것으로 계승될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 11일에는 춘천시에서 술 포럼이 있어, 그곳을 다녀왔습니다. 주제가 누룩이었습니다. 누룩을 포럼의 주제로 삼다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참여하는 시민들에게는 누룩의 품질을 직접 확인시켜주기 어렵고 그것을 활용하여 현장에서 유의미한 체험을 하기도 어렵기에, 낯설고 생소한 소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싶었는데, 강원대학교 60주년 기념관의 강연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춘천에서 양조장을 준비하는 이, 막걸리 주점을 운영하는 이, 이웃한 가평과 연천에서 술 빚는 이들이 소문을 듣고 참석하였습니다. 춘천시장과 강원대학교 총장과 시의회 의원들도 참여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막걸리 바람이 불고, 수제 막걸리 양조장들이 생기고, 음식점에서 양조장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면서 한국 술과 누룩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과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