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신입사원 채용 직무적성검사를 치른 취업준비생들이 고사장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가잔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
문제는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다. 도처에 널린 '취업률 1위 대학', '취업률 100% 보장 자격증' 등 정보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가진 자원을 대부분 쏟아 넣어야만 그 자격 하나를 획득할 수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은 과연 그 결과로 좋은 일자리들을 찾고 있을까? 어렵사리 찾아 들어간 직장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도, 혹은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여겨져도,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가진 자원이 부족해서 그만두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즉, 나쁜 일을 거절할 자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어쩌면 '단기근속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손꼽히는 '초단기근속국가'다. 3년 이내에 직장을 옮기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한국의 일자리 관련 제도들은 대부분 단기근속자들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한국에서는 한 번 직장을 그만두면, 그리고 몇 년 쉬고 나면 경력에 손해를 입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분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말이 거의 보통명사가 됐을 정도로 여성들에게 이 문제가 집중돼 있지만, 사실 남성들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는 않다. 경력 단절을 감내할 수 없기에 몸이 아파도, 정신적으로 지쳤어도, 직장을 그만두지 못 하는 남성들이 많을 뿐이다.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람들도 손해를 본다. 근로기준법 상 연차휴가는 장기근속을 해야 쌓인다. 그나마 지난해 '신입사원에게도 휴가를'이라는 입법 캠페인 덕분으로 입사 후 2년 동안 휴가가 7~8일에 불과했던 점은 개선됐다. 그래도 3년 이내에 직장을 몇 차례 옮긴 사람이라면 사회생활을 한 지 10년 가까이 되더라도 연간 최대 15~16일밖에 휴가를 못 쓴다. 한 직장에서만 10년 이상 다녀야 비로소 연차 휴가가 20일을 넘어간다.
물론, 근로기준법 상의 연차휴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정 최저선이다. 법으로 최저임금 정했다고 모든 임금을 거기에 맞출 필요는 없듯이, 연차휴가를 법정 최저선에 맞출 필요는 없다. 조직마다 노사가 협의해서 휴가를 늘리거나, 휴가 부여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차별 없이 누구나 연간 25일의 휴가를 쓰도록 하는 식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조직율이 10%대에 불과하고, 노사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의하는 문화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쉽지 않은 일인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장기간의 휴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휴가 가기 위해 사표를 내는' 현상도 나타난다. 일정 기간 쉬기 위해서 이직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직장에서 연차휴가를 새로 쌓아야 하므로 또 휴가가 모자라는 악순환이 생긴다.
그밖에 실업급여, 국민연금에 있어서도 단기근속자의 경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단기근속자들은 자발적으로 퇴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업급여를 받지도 못 한다. 국민연금을 꾸준히 붓지 못 해 노후도 불안해진다.
단기근속자들에게 지극히 불리한 사회
최근 논의되는 '정년 연장'도 단기근속자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현재 정년 연장은 노인 빈곤 문제와 연결돼 있지만, 연공서열에 따른 고연봉자들에게 지니치게 유리한 제도라는 비판도 있다. 청년기에 한 직장에 들어가서 30~40년 다닌 후에 정년퇴직 하는 사람들만을 놓고 보면, 이미 상당한 연봉과 근로조건을 누리고 있는데 그 기간을 연장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단기근속자들이 많은 사회에서라면 연공서열만으로 퇴직 직전에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년을 법으로 정하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조직에서 직원들이 몇 세까지 일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기준이 될 뿐이다. 따라서 정년 연장을 논하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 의미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제대로 파악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갑론을박만 이어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기근속을 하건 단기근속을 하건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능력과 경력이 있어서 채용된 사람들조차도 '계약직' 혹은 '비정규직'이라는 구분 때문에 공채로 채용된 '정규직'에 비해서 이런저런 차별을 받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현상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일과 관련된 법과 제도 개선은 상당히 빠르게, 다방면으로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그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미 현실에서는 장기근속사회에서 단기근속사회로의 전환이 상당부분 이뤄져 있고, 특히 앞으로 수십 년 일하며 살아갈 청소년, 청년 세대의 지향이 단기근속사회에 가깝다. 그런데도 제도를 그에 맞게 바꿔가지 못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틈에 끼여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 부모가 특권층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 고통은 더 집중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큰 틀의 변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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