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군산 강의 때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조종안
"백범은 1934년 4월 초순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 교육 중 난징을 찾아 생도들을 위로한다. 당시 백범은 약산의 소개를 받아 연설을 하는데, 조선 해방은 학생들이 최후의 분투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만년필 한 자루씩을 선물했다. 2기생 중에는 조선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 정율성도 있었다."- 김종훈 기자의 <약산로드 7000km> 241~242쪽에서
두 사람은 1939년 5월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을 발표한다. 16쪽으로 된 발표문에는 '공개신(公開信)'이 만들어진 배경과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반성, 방향, 그리고 미래에 대한 논의 등이 온전히 담겼다. 문장이 시작될 때마다 들어간 '兩人(우리 두 사람)'은 백범과 약산이 어떤 각오와 자세로 글 작성에 임했는지를 암시한다.
공개신 말미에 10개 항으로 된 강령도 덧붙였다. 강령은 조선민족의 자주독립 국가 건설, 민주 공화제 건립, 매국적 친일파 재산 몰수,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 농민에 분급, 노동시간 감소, 각종 사회보험사업 시행, 정치·경제·사회적 면에서 남녀평등 보장, 국민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국비로 시행 등을 언급하고 있다.
백범과 약산의 공개신은 발표 3개월 뒤 개최된 7당 통일 회의에서 결렬된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에 속한 7개 정당 및 단체 대표들이 통일방안과 최고기구 문제를 놓고 의견만 대립했지, 결론은 내리지 못한 것. 하지만, 이 만남은 194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치 아래 좌·우 양 진영이 하나로 모이는 자양분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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