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위령제를 마친 뒤 대전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들이 표지석 제막식을 갖고 꽃은 심는 장면.
오마이뉴스 장재완
여순사건 발발 며칠 후 전남 순천군 상사면 오곡리 청년들이 면소재지가 있는 흘산리 성○○ 면장 집으로 몰려갔다. "성○○, 이 자식 빨리 나와!" 미처 도피하지 못한 성○○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방안에서 나왔다. 한 청년이 "이놈의 반동새끼 죽어봐라"하며 성○○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결국 주검이 된 상사면 면장 성○○을 뒤로하고 오곡리 청년들은 마을로 돌아갔다.
오곡리 좌익 청년들이 우익세가 강한 면소재지로 가서 테러를 감행한 이유는 뭘까? 평소에 오곡리와 흘산리 간에 좌·우 갈등이 격심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이 사건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전해들은 김종구(78세.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는 오곡리 청년들이 상사면 면장을 해꼬지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주철희는 "여순사건 당시 상사면장은 성○○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상사면 면장 테러사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상사면 내 좌·우 갈등이 극심했다는 걸 보여준다.
순천이 진압된 후 오곡리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오곡리 주민들 전체가 마을 한가운데에 집결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원들이 주민들을 에워쌌다. 경찰지휘자는 주민들을 가족 단위로 심문했다. "네 남편 어디 갔어?" "...." 간부의 턱짓에 경찰과 우익단체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성과 그녀의 가족들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갓난아이들은 앙앙 울어댔다.
이번에는 김태수 가족 차례였다. 가장(家長) 김태수는 도피한 상태였다.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에 마을 청·장년들은 유·무죄를 막론하고 모두 도피했다. 경찰지휘자의 신문에 김태수 아내 정순례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어디로 피신해 있는 줄 몰랐다. 정순례가 말이 없자, 이번에도 그녀에게 몽둥이찜질이 가해졌다.
진압군의 '빨갱이 색출작전'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며칠간 지속되자 주민들의 시달림은 극에 달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김태수(당시 31세)는 경찰들 앞으로 자진해서 나아갔다. 가족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나가 뭔 죄가 있다고 도망다닌다요?" 죄가 없어 당당했던 그는 경찰들 눈에 띄자마자 밧줄에 묶여 트럭에 태워졌다. 오곡리에서는 김태수만 연행된 것이 아니었다.
박생규(당시 28세)와 오지평(당시 25세)이 끌려갔다. 김태수와 이들은 1948년 12월 13일 광주지방검찰청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여 후에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후퇴하던 대한민국 군·경이 자행한 집단 학살이었다.
아버지 없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