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부대기 뒤편 중앙이 김원봉 대장(사진출처: 임시정부 항주 기념관에서).
조종안
위는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 창설 기념사진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집중 공격으로 남경(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세력을 거느리고 난징을 떠나 후베이성 우한(武漢)으로 간다. 그는 이듬해(1938)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아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 청년들을 재규합,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한다.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인물로 경남 밀양 출신이다. 밀양초등학교 재학 중 일장기 똥통 투척 사건을 주도해 퇴학당한다.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톈진의 덕화학당(독일계 학교), 난징의 금릉대학(영문과) 등에서 수학한다. 당시 약산은 5개 국어(한국어, 중국어, 일어, 독일어, 영어)를 구사하는 보기 드문 엘리트 청년이었다.
1919년 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군사학 및 폭탄 제조법을 익힌다.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 집에서 뜻을 같이하는 윤세주, 이성우, 곽경 등 13명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義伯)으로 추대된다. 그 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관공서 폭탄 투척과 고위 관료 및 친일파 처단 등으로 침체됐던 항일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9월),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12월),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 다나카 기이치 육군 대장 저격 미수사건(1922), 동경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1923) 등 약산이 주도한 숱한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가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백범 김구보다 많았던 현상금 액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약산은 의열단을 이끌면서 소규모 조직 투쟁에 한계를 느낀다. 강하고 짜임새 있는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26년 동지들과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장제스 국민정부와 인연을 쌓으면서 4기로 졸업한다. 그 후 장제스 도움과 황포군관학교 교관 경험을 바탕으로 1932년 가을 난징 외곽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항일투쟁을 이끌 군관을 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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