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아이들의 냉혹한 세계, 어른들의 온기가 필요

[리뷰] 왕수펀 <처음엔 사소했던 일>, 알고 보면 사소하지 않았던 일들

검토 완료

양선영(omysun3)등록 2019.10.07 15:57
<처음엔 사소했던 일>은 대만 작가 왕수펀의 청소년 소설이다. 청소년이 읽기에도 좋지만, 어른들이 먼저 읽고 권해주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짜임새와 내용을 품고 있다. 소설의 특이점은 우연히 시작되었던 일에 대처하는 여러 학생들이 왜 그런 반응과 대응을 보이느냐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사소했던 일이었다. 별것 아니었던 일은 여러 아이들과 관련되면서 확장된다.
 

왕수펀 <처음엔 사소했던 일> 표지 ⓒ 뜨인돌

 
대만의 어느 학교 7학년 1반 교실에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디즈니랜드에서 사온 '고급진 것'이라며 자랑하던 린샤오치의 금색 볼펜이 사라진다. 그 볼펜이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잘생긴 천융허의 필통에서 발견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천융허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아이들의 증언은 하나같이 천융허가 범인임을 지목한다. 
 
린샤오치의 볼펜 실종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겐 하나같이 모두 상처가 있다. 잦은 이사로 제대로 친구를 사귈 수 없는 린샤오치, 작은 키로 놀림 받는 리빙쉰,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있는 차이리리, 엄마와 아빠의 꼭두각시 같은 장페이페이, 어릴 적부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저우유춘, 키가 너무 크고 말라 놀림 받는 뤼취안, 여자들의 과도한 관심이 늘 부담스런 천융허 등 모두들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들이 있다. 아이들은 이 아픔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밝고 안정된 겉모습을 꾸며낸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이들은 서로의 평가와 시선을 두려워 하며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음을 꾸미고 감춘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면 멸시를 당할 것이란 두려움이 존재한다. 아이들에게 평범하지 않다는 것, 남들보다 못하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친구들의 시선에는 그토록 신경쓰면서 정작 친구들을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친구들이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자신의 어떤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 상대가 지금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의 학급 담임인 왕선생은 섣불리 천융허를 도둑으로 단정하지 않은 원숙함을 보인다. 실체는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말을 하며,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복잡성을 감지해낸다. 그녀에게도 과거의 상처가 존재한다. 좋아하던 작가 앞에서 과하게 긴장한 탓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거짓말쟁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아팠던 과거는 왕선생에게 성급한 판단을 보류하는 혜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역시나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이다. 왕선생은 부임 초기의 열정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며 과도한 업무에 치이면서 복잡한 아이들의 일에 끼여들 적극성을 '생각으로만' 가질 뿐이다. 아이들보다 비교적 통찰력 있는 시선을 견지하지만,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무기력함을 보일 뿐이다. 더구나 도둑으로 속단하지는 않아도 천융허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아이들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소설에 그려지는 아이들의 부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이다. 어떤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떤 부모는 정서적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여력이 없어 보인다. 아이의 상처를 보듬기는 커녕 자신들의 상처를 추스리기에도 힘겨워 보인다. 상처를 품은 아이들이 그 상처를 통해 친구들을 왜곡해 바라보는 것은, 실상 '대물림'에 다름 아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문제를 자신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고, 상대를 이해해 보려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꼬이기만 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이 정체된 관계들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솔직하게 표현할 진정한 '소통'이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과 아이들, 선생과 아이들, 아이들과 부모들, 모두들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당면한 문제와 상처를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누군가의 상처를 알게 된다면 조금은 다른 대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내 안의 문제와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관계는 숫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누군가의 상처를 경청하고 공감했다 한들, 그 소통은 거기에서 끝이 난다. 특정한 소통은 저 너머의 또다른 타인에게는 이해와 관용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의 소통은 여러모로 까다롭다. 모두와 소통할 수 없다는 것,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소통의 한계이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품은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소통은 '나'와 누군가의 소통으로 드러난 문제와 상처들이 다른 관계 내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나'와 소통하지 않은 타인도 그러할 것이라는 '따뜻한 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긍정적인 소통은 누군가에게 공감받은 기억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는 타인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상처와 아픔이 안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건 굳이 소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보편의 정서이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상처는 의도적이기 보다는 이미 존재했던 상처와 열등감이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어긋나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앞의 누군가도 '나'처럼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진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동병상련과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상상력은 서로의 가련함에 공감하며 말과 행동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작은 가시들을 제거하려 노력할 수 있다. 별스런 의도가 없는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별스런 의도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말이다. 어쩌면 조금 피곤한 일이 되겠지만, 그 작은 노력들은 나비가 태풍이 되는 사태를 막을 수도 있다. 

<처음엔 사소했던 일>에 등장하는 청소년 인물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상처를 그려내는 상상력이 빈곤하다. 자신 안의 상처 때문에 누군가를 따라하고 동조하는 일련의 행동들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이해의 노력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건 현실의 청소년들이 보이는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겐 저 너머 타인의 상처를 인지하고 위할 줄 아는 마음을 보여주는, 모델링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 대상이 많지 않다. 주변의 어른들 중 이들의 불행에 공감하며 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람이 없다. 어른들은 무기력하고, 강압적이며 아이들처럼 자기 중심적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상처에 무지하며 무관심하다. 그것 역시 현실의 어른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씁쓸하다.

왕수펀의 <처음엔 사소했던 일>은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들의 반성을 이끌어낸다. 자신들의 상처에 무감한 어른들을 통해서 아이들을 역시 친구들의 상처에 무감해진다. 부끄럽게도 필자 역시, 소설 속 어른들의 모습과 별반 다들 바 없는 처지이다. 이 부끄러움이 그저 감상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말 한마디, 눈짓 한번이라도 신경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아이들은 상처받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들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만들지 않도록 어른들의 따뜻한 상상력이 무척이나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의 사정을 듣기 전부터 어른들은 그들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깊게 소통하지 않았더라도 전해진 온기는 사소했던 일을 그저 사소하게 지나가게 해줄 터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