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루쉰공원(홍커우공원) 내 마련된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탐방단.
오마이뉴스 장재완
첫날 일정은 점심을 먹은 후 홍커우공원(루쉰공원)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천장절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물통)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저격한 곳이다.
예전 이 곳은 홍구공원이라고 불렸으나 루쉰의 묘가 옮겨 오면서 이제는 루쉰공원으로 불린다. 공원의 한켠에는 별도의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생애사적기념관(매원)'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된 정자 형태의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상이 한국말로 상영되고, 윤 의사가 남긴 글과 자료,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탐방단은 자리를 옮겨 윤 의사가 실제로 폭탄을 던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루쉰의 동상이 서 있는 곳 어딘가에 당시 행사를 위한 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쪽에서 윤 의사가 폭탄을 던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매원 입구에 있는 '윤봉길의거현장표지석'과는 거리가 있다. 공원의 구조와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표지석이 있는 곳이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그 해 25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 오직 조국만 사랑했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의거에 나섰는지를 잘 보여주는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를 소개한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는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홍커우공원을 나선 탐방단은 상하이 마당로에 위치해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인 1932년까지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상하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다.
3층 벽돌집으로 된 이곳에서 탐방단은 1층에서 영상을 시청한 뒤, 2층과 3층 전시관을 관람했다. 이곳에는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서적, 사진 등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도 있다.
임시정부가 이곳에 있을 때 이봉창 의사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폭탄을 만들어주면 일왕을 죽이겠다고 큰소리쳤던 이봉창 의사는 너무나도 활짝 웃는 사진을 남겼다. 우리의 해설을 담당하던 홍소연 해설사는 "젊은이 여러분, 그 당시 그 어느 날, 이봉창 의사가 저 4호 문을 두드린 것처럼 여러분도 한번 두드려 보세요"라고 권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만나 이봉창 의사가 했다는 말을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인생관을 들으니 감동으로 눈물이 벅차올랐다'고 그 순간을 기록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