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샤를마뉴 중학교 학교를 마치고 하교하고 있는 중학생 아이들
목수정
[기사 수정: 19일 오전 9시 54분]
70일이 넘는 프랑스 파리의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초 딸 아이의 중학교 마지막 해가 시작되었다. 지난 주엔 학년별로 치러지는 학부모회의가 있었다. 앞으로 1년간의 주요 일정에 대해 설명한 후, 이례적으로 방학 전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보고가 이어졌다. 조사는 아이들의 생활 습관, 문화 활동, 취미 생활, 학습 태도 등을 상세히 물었고, 학교는 이 결과와 아이들 학업 성적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성적 상위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은 연중 가장 많은 수의 전시(연 12회 이상)를 비롯 가장 많은 공연과 영화를 관람하며, 평소에 집에서 읽는 독서량뿐 아니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가는 도서의 수도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이 그룹에서 체육활동이나 음악이나, 무용, 미술 등 예체능 활동을 병행하는 아이들의 비율도 가장 높았다. 반면 이들의 평균 학습량은 일주일에 3~4시간에 불과했다.
중위권 그룹의 아이들은 첫번째 그룹 아이들에 비해 문화 생활의 시간은 떨어졌지만, 놀랍게도 공부하는 시간은 주 5~6시간으로 오히려 더 많게 나타났다. 마지막 그룹,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분류되는 아이들은, 거의 모든 문화활동에 소극적이었고, 책을 빌려가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스크린과의 접촉만큼은 가장 높은 수치로 나타났다. 즉, 핸드폰이나 게임기, 텔레비전 등과 접하는 시간은 학업 성적과 반비례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전시나 공연을 보러가고 책을 읽는 것은, 학업 공부가 아닐지라도 많이 할수록 오히려 학과 성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모든 아이들에게서 부족하게 나타나는 것은 수면 시간이었다. 14세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권장 수면 시간 8~9시간에 못미치는 7시간 내외의 수면을 아이들은 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1) 풍성한 문화 활동은 아이들의 지적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 2) 공부하는 시간이 길다고 해서 좋은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학습 습관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하여, 교사들은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 학교에서도, 더 많은 문화체험의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아이들이 책가방 속에 꼭 책 한권씩을 넣고 다니는 것을 체계적인 습관으로 만들겠다. 또한, 한꺼번에 몰아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날 배운 것들을 한 번씩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아이들을 격려해 달라. 가급적, 아이들이 스크린과 접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통제해 달라."
학교에서는 이미 가을에 보러갈 영화 3편(히치콕 영화를 비롯한 현대의 고전들)을 예약해 두었다고 말했고, 파리 중심부의 미술관 그랑 팔레에서 하는 전시도 단체관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학부모에게만 짐을 떠넘기지 않고, 학교 스스로도 설문조사 결과를 즉각 교육 방침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집에 돌아와 우린 아이와 마주앉아, 지난 1년간 우리가 섭렵해온 문화적 외출들의 발자취를 헤아려 보았다. 과하다 싶게 많은 전시의 목록들이 집계되던 중 아이가 문득, 2년 전 불어교사의 인도로 입문했던 오페라와 연극의 세계가 그립다는 고백을 꺼내놓는다. "연극이 고프다"는 아이의 말은 아이의 불어 교사가 뿌려준 씨앗이 마침내 아이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는 신호로 들렸다. 부모가 채워주지 못한 문화자본의 한부분이 공교육을 통해 채우는 기쁨을 맛본 순간이다.
자본과 문화자본의 간극
음악원에 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고, 주말이면 전시나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 세상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무용이나, 테니스, 승마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영위하는 삶. 그것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삶을 영위하는 흔한 방식이다. 그런 삶의 방식이 학업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들의 문화생활을 챙긴 게 아니라, 그것이 이미 부모가 누려온 삶의 방식이었기에, 아이들도 함께 공기처럼 누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부르디외가 말한 소위 '문화 자본'을 풍부하게 소유한 도시 중산층의 자녀들이 학업성적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인다는 얘기는 당연한 귀결로 들리면서도, 다양한 문화예술적 체험이 아이들의 학교 성적에 "공식처럼" 또렷이 투영된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