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 이모의 방은 금기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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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육남매 중 막내다. 그런데 사실은 육남매가 아니라 칠남매였다고 한다. 엄마에게는 언니가 한 명 더 있었다. 엄마의 첫마디는 언니가 무척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옛날, 엄마의 착한 혜자 언니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 언니는 결혼을 서둘러 달라고 부모님에게 부탁했지만, 부모님은 오빠들이 결혼하기 전에 먼저 시집가서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방에서 목매단 채 죽은 언니를 발견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날 이후 엄마에게도 그 방은 출입금지의 방이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혜자 언니의 죽음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혜자 언니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내가 묻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무 살 무렵, 나는 정말 그 방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를 섬뜩하게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모였다니.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할머니 집에 잠시 머물다 도시로 떠났고, 혜자 이모의 이야기도 잠시 나에게 머물다 떠났다. 80년대 여성에게 혼전 임신이란 어떤 무게였을지, 이모에게 임신중절수술이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 무엇이 이모를 죽음으로 떠밀었는지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 시대, 그 방과 물리적으로 떨어진 나는 쉽게 그 방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막내딸이었던 엄마는 무럭무럭 자라 스무 살에 한 군인을 만나 시집을 갔다. 한 번 몸을 준 남자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던 엄마는 아빠에게 '몸을 준' 밤 이후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한 해에 내가 태어났고, 2년 뒤 동생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아이를 낳을 때 어땠냐고 묻곤 했고, 그럼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생생하게 그 순간을 들려줬다.
군인이었던 아빠가 부산에 있어서 엄마 혼자 외롭게 나를 낳았다는 이야기, 나를 낳고도 한 달 동안 아빠가 찾아오지 않자 놀란 외할아버지가 바람난 거 아니냐며 엄마와 나를 서둘러 부산까지 택시 태워 보냈다는 이야기, 둘째 승희를 낳을 때도 아빠는 곁에 없었다는 이야기, 함께 산부인과에 갔던 외할머니가 둘째도 딸이라는 걸 알고서 엄마를 두고 휙 돌아서 가버렸다는 이야기, 엄마는 갈비탕이 무척 먹고 싶었는데 가버린 자신의 엄마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는 이야기.
여아 낙태가 빈번하게 이뤄졌던 88년, 90년에 우리 자매는 엄마의 설움을 먹고 태어났다. 용띠와 백말띠의 여자는 드세다고 임신중절수술이 '조장'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자연스레 '가족'에 포함되었다. 적어도 엄마가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혼 후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부터 엄마는 착한 막내딸이 아닌, 집안의 수치로 여겨졌다. 엄마의 자식인 나와 동생도 자연스레 가족에서 멀어졌다. 명절 풍경이 사라진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할머니 곁을 지키는 엄마에게 엄마의 큰 오빠는 당장 집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엄마는 싫다고, 오빠의 엄마지만 내 엄마기도 하다고 저항했다. 한 번은 큰오빠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할머니의 병문안을 온 적이 있다. 그때 병실에서 엄마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큰 오빠가 엄마를 뒤로 쏙 빼고 이모만을 '미국에서 온 권사'라고 목사에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엄마는 남매들이 만든 가족 밴드에서 나왔다. 엄마가 나온 건지, 밀려난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방에는 누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