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요인과 중국인들(앞줄 왼쪽부터 진동생 부인, 정정화 여사, 민영구 모친, 연미당, 주가예/ 뒷줄 왼쪽부터 진동생, 중국인,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저봉장)
조종안
백범은 삼일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어 최준례 여사가 큰아들을 데리고 따라왔고, 프랑스 조계지에 집(영경방 10호)을 마련, 가족이 오붓하게 지냈다. 그러나 평소 병약했던 아내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귀국한다. 이후 홀몸이 된 백범은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정정화(1901~1991) 여사 도움을 받는다. 당시 정 여사는 김구, 이동녕 등을 친부모처럼 모신 것으로 알려진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시정부가 항주(항저우)로 옮겨가고 백범은 '상해항일구원회' 회장인 주푸청 도움으로 가흥(자싱)으로 피신한다. 주푸청 수양아들의 별채(매만가 76호)로 몸을 숨긴 백범은 '장진구', '장진'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주푸청 큰며느리(주가예)에게 큰 도움을 받는다. 특히 서른일곱 살 아래인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 중국인 행세를 하며 대부분 시간을 조각배에서 지냈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청사를 강소성 진강(鎭江)으로 옮긴다. 김구는 남경(난징) 회청교 부근에 거처를 마련한다. 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암살대를 파견하자 가흥에 있는 주애보를 데려오는 결단을 내린다. 백범은 고물상 부부로 신분을 위장, 일제의 감시를 따돌린다. 하지만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 폭격으로 난징까지 위태롭게 되자 난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주애보와 이별한다.
이동 버스에서 문득 떠오른 피난 시절 김구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셋째 날(3일), 일행은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항저우에서 서호(중국 10대 명승지로 꼽히는 거대한 인공호수), 임시정부 항주유적지 기념관, 애국지사들의 발자취가 서린 사흠방, 오복리, 청태 제2여사 등을 돌아보고 난징(남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