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과 2019년 김용자의 모습왼쪽은 2006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때 찍은 사진, 오른쪽은 2019년 모습이다.
민병래/ 오마이뉴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뿔뿔히 흩어진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모아내고 싶었다.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열리면서 기회가 왔다. 민주화운동보상법이 시행되자 김용자는 석정남과 같이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연락처를 확보했다. 그것도 경찰의 도움으로!
그렇게 해서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이며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손해배상'도 받았다. 남은 것은 '원직복직'뿐이다. 내일 사표를 쓰더라도 현장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다리쉼을 하더니 다시 힘이 났는지 춘분이가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오늘 기필코 '동일방직'까지 가자고.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자, 모두 합창하듯 말한다.
김용자와 동지들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못다 한 이야기>
1. 1972년 당시 조합원 1383명 중 1214명이 여성이었던 동일방직은 섬유연맹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를 탄생시키며 민주노조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75년에도 이영숙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었습니다. 노조비 지출명세 공개, 여성 종업원의 생리휴가, 회사 창립기념일의 유급 휴일화, 기숙사 온수시설 등 조합원의 요구를 대변하며 절대 다수 여성 조합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섬유연맹체제의 균열을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연맹 김영태와 인천 동부서를 직접 지휘하고 반조합파 남자 직원들을 앞세워 노조와해작전을 개시합니다. 이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이며 중앙정보부 인천 조정관 최종선의 증언에 의해 소상하게 밝혀집니다.
2. 김용자 선생의 경력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버스 안내양 생활입니다. 당시 안내양은 하도 힘들어 별로 지원자가 없어 쉽게 취직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김용자 선생도 블랙리스트로 해고가 거듭되자 버스 안내양으로 취업했습니다다. 제물포여객, 선진여객, 항도여객에 다녔고 그때는 안내양이 현금과 토큰을 받을 때였습니다. 하루 만원을 '삥땅' 해서 기사에게 주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몸수색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김용자 선생은 안내양을 설득해 사감 방문에 못질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여인숙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일을 거부했습니다. 버스 운행이 중지되자 난리가 났고 '몸수색 중지'를 합의하고 농성을 풀었지만, 여기서 주동을 했다고 다시 구류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동일방직 해고자임이 밝혀져 수배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3. 78년 2월21일 똥물 사건 때 이총각 지부장은 냉정하게 대처했습니다. 회사 앞 사진관에 촬영을 부탁했고 덕분에 증거사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4. 동일방직의 뿌리는 1934년 10월 1일 인천시 만석동에서 조업을 시작한 도오요방적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연소자나 부녀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를 금지하는 공장법이 없었습니다. 일본 자본으로서는 천국의 땅이었지요. 해방후 적산으로 미군청에 귀속되었고 동양방적공사에 흡수되었습니다. 1955년 귀속면방업체 민영화방침에 따라 동양방적주식회사로, 1966년 1월 회사명칭을 동일방직으로 변경, 오늘에 이릅니다. 현재 본사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고 공장은 인천, 청주, 장항 등지에 있습니다. 한국거래소 상장기업으로 수천억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5. 민사재판판결문의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원문을 글 분위기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1. 제1심 판결중 원고들에 대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변경한다.
가.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 2 손해배상금 목록의 '환송후 당심 인용금액'란 기재 각 해당 돈과 각 이에 대하여 2018.11.23.부터 2018.12.14.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돈을 지급하라.
나. 원고들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6. 지면관계상 싣지 못한 김용자선생의 더 많은 이야기는 민병래의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pmsigni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건일지 |
1972.5.10. : 대의원대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성지부장 주길자 탄생
1975.2.10. : 주길자 후임으로 여성지부장이던 이영숙 선출
1976.7.23. : 인천 동부경찰서 이영숙 지부장 유인물배포혐의로 연행, 회사측 기숙사폐쇄하고 고두영 및 회사측 대의원만 참가한 상태에서 대의원대회 개최. 조합원 400여명 농성시작
1976.7.25. : 경찰 기동대 출동. 조합원 72명 연행
1977.4.4. : 이총각 지부장 선출
1978.2.21. : 새벽 5시55분 똥물사건 발생
1978.3.10. :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노동절행사에 동일방직 노동자 65명이 들어가 항의시위
1978.3.17. : 명동성당에서 41명 단식 농성
1978.3.26. :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에 노동자 6명 마이크 탈취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구호 외침
1978.4.1. : 회사로부터 124명 해고 통보
1978.4.10. : 섬유노조 본조에서 김영태 명의로 블랙리스트 각 사업장에 발송 '
1978.9.22. :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동일방직 사건 연극' 후 농성과 시위.
1978.12.13. : 부당해고에 관한 재심청구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기각
1980.1.14. : 노총중앙위원회 참석. 동일방직 문제 해결 요구
1980.4.25. : 해고장 30명 노총위원장실 점거하고 석방과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 시작
1980.5.17. : 비상계엄 확대로 25일만에 단식 농성 해산
2000.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
2001.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 증서교부
2006년. 진실화해및 과거사진상위원회에 "동일방직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 및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규명해 달라" 신청
2007년 2월 20일 직권조사 결정
2010년 6월 30일 "중앙정보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국가폭력임이 중정보관문서, 중앙정보부 인천조정관 최종선의 증언"에 의해 밝혀짐
2015년 국가폭력에 의한 정신적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국가와 화해가 성립되었다"며 원고 패소판결
2017년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헌재는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금지는 위헌"이라고 판단
2018년 12월14일 서울고등법원제15민사부 손해배상결정과 함께 금액 통보 |
<나머지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