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천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그는 장터에서 늘 손님들과 웃으며 노닌다.
민병래
여름 날 긴 햇살이 저만치 물러가면 장터도 나른해지고 장꾼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여기저기서 물건을 거두는 소리도 벌써 들리기 시작한다.
이희천은 바지춤에 손을 넣어 본다. 어림짐작에 오늘 5만원은 족히 들어온 것 같다. 마수걸이는 시계줄이었다. 늘어진 줄을 갈고 삼천 원을 받았다. 야채 파는 할멈은 안 받으려 해도 천 원짜리 한 장을 놓고 갔다. 그리고 시계를 두갠가 팔았다. 사실 정신도 가뭇가뭇해 얼마나 팔았는지, 뭘 팔았는지 기억도 못한다. 이젠 장터의 구수한 내음이 좋을 뿐이다.
그가 삽교읍에서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보자기를 펴고 라이터 장사를 했다. 말뚝 라이터를 팔았다. 그 다음에 성냥갑 라이터, 흔히 '지포'라고 부르는 라이터를 팔았다. 한 개당 150원 정도 받았는데 나름 장사가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기름 대신 가스를 쓰는 1회용 라이터가 보급되면서 장사가 별 볼일 없어졌다.
그래서 안경과 시계로 눈을 돌렸다. 안경은 '안경사'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점포도 없으니 주로 돋보기와 안경다리를 팔았다. 시계는 한동안 잘 팔렸다. 입학 선물로도 곧잘 나갔고 70, 80년대에는 손목에 시계 하나씩은 다 둘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핸드폰이 나오고선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업종을 바꿀 수도 가게를 차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중고시계를 팔고 고장난 시계 고쳐주는 일로 나섰다. 지금은 전자시계여서 약만 갈면 되지만,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는 손 볼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파는 장사는 3할이고 고치는 장사는 8할 이문이여"란 말을 달고 살았다. 늘 손가락 다섯 개를 내보이며...
"어르신, 이제 물건 거두지유." 생선장수가 풀 죽은 목소리로 채근한다. 마지못해 이희천이 주섬주섬 물건을 거두기 시작한다. 오늘 팔지 못한 생선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사실 5일장이 예전만 못하다. 무엇보다 촌에 인구가 줄면서 장터에 사람들이 별로 꼬이지를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당진 시내나 대전의 마트로 쇼핑을 가고 5일장은 노인들 차지가 되어 생기가 없다. 생선장수만 푸념하는 게 아니다.
이희천은 오늘 저녁을 사먹고 삽교에 있는 집에 들어갈 작정이다. 안식구(그는 늘 안식구라고 부른다)가 수원에 있는 애들 집에 다니러갔기 때문이다.
'손고락' 다섯 개를 재산으로 한평생
그는 중신애비의 소개로 스물일곱에 여섯 살 어린 안식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문턱도 안 넘었고, 재산은 고작 라이터뿐인 그에게 와준 아내가 고마웠다. 신혼여행도 없던 시절이지만 삽교읍에서 가까이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도 가봤고 예당호에도 놀러갔다. 나름 재미있게 신접살림을 할 즈음 그는 입대를 했다. 그때가 휴전 직후였다. 부산에 있는 병참부대 8기지창에서 식량관리 보직을 맡아 서대전으로 파견근무를 갔다. 가서 보니 식량창고 바닥만 쓸어도 쌀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때 이희천은 욕심이 났다. 제대 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희천은 "대전으로 이사 가자"고 안식구를 보챘다. 창고관리만 잘해도 한 밑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 안식구는 "여보쇼! 이등병 쫒아가 살림하면 도둑놈 소리 듣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 날 이 얘기는 그에게 큰 깨달음이 되었다. 그때부터 "장사꾼은 신용이 첫째유"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안식구와 재미나게 살았지만 구박도 없지 않았다.
안식구가 어느 날은 "여보쇼, 지금은 두식구여서 라이타 몇 개 팔아먹고 살지만 애들 나면 어쩔거유, 왜 그리 주변이 없어유, 돈 얻어 큰 장사해봐유"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때 이희천은 "내 다섯 '손고락'이 재산이니께 걱정 말어. 어디 일 나갈 생각 말고 가만 앉아 나만 기다려..."라고 말하며 등짐장사를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