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당 건물 안에 함께 있는 노자와 석가모니와 공자
김기동
삼수당(三修堂)에서 '수(修)'는 한국 한자에서는 '닦다, 익힌다'라고 해석하지만, 중국어에서는 '고쳐서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은 삼수당이라는 공간을 찾아 각각 다른 능력을 갖춘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에게 이루고자 하는 바를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각각의 종교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다른 사상이 서로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필요한 부분을 망설임 없이 가져다 사용하는 걸 실용적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한국 융통성과 중국 영활성
한국에서는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를 '융통성'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융통성'이란 단어를 금전, 물품 따위를 돌려서 쓰는 경제 행위라는 의미로만 사용한다. 중국에서 한국의 '융통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영활성(靈活性)'이다. 글자 의미대로 해석하면 '영혼이 자유로운 성격을 가졌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 사람이 사용하는 영활성의 의미는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융통성과 전혀 다르다.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융통성을 가진다'는 말처럼, 한국에서 융통성이란 어떤 일을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그 일의 원래 목적이나 원칙을 벗어나면 안된다.
중국 사전에서 영활성이란 '원칙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원칙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규칙이라면, 영활성은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영활성과 원칙성은 정반합의 관계로, 처음에는 원칙성의 기초에서 영활성 있게 일을 처리하지만, 영활성이 발전하면 또 다른 원칙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영원불변한 원칙이란 없고, 그래서 현재의 원칙도 완벽하다는 보장이 없으니, 영활성을 발휘하여 원칙을 계속 고쳐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중국 사람에게는 한 공간에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같이 모시고, 필요에 따라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
중국 어린이 필독서 <증광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귀는 중국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면 내가 배울만한 스승으로 삼고, 어떤 사람에게서 나쁜 점을 발견하면 혹시 나에게도 그런 나쁜 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글귀의 원래 출처는 공자의 제자들이 쓴 <논어>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에게나 배울 만한 부분이 있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의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라는 의미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이다.
<증광현문>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기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은 항상 '내 맞고 너 틀리다'가 아니라 '내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의미다. 중국 사람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심지어 전혀 다른 두 개의 요소를 버무려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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