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과 오페라의 유령

고태규의 유럽 자동차 집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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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규(tgko)등록 2019.06.17 10:54
89일째: 6월 1일 (토) 맑은 날씨다
 
대영박물관과 오페라의 유령
 
오늘은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영박물관에 가는 날이다. 박물관을 싫어하는 아내는 시티투어를 하기로 해서, 저녁에 피카딜리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로 헤어졌다. '같이 또 따로'다. 혼자 돌아다니면 내 마음대로 코스와 시간을 정할 수 있어서 좋다. 당연히 서로 부딪칠 일도 없고.
 
내가 그렇게 대영박물관을 기다렸던 것은 거기에 전시된 유물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모하는 한 여인 때문이다. <꽃을 따는 처녀 - Flora>. 여신처럼 날씬한 몸매,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자락, 맨발로 걸어가는 가벼운 걸음걸이, 조심스럽게 꽃을 따는 가냘픈 손가락, 우아하게 살짝 돌린 고개. 연두색 바탕에 흰색과 노란색을 주로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아주 부드럽고 싱그럽다. 아름다운 처녀(또는 여신)가 봄바람이 산들거리는 들에 나가 야생화를 따는 그런 풍경이랄까? 뒷모습만 그린 그림이라서 호기심이 더 간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그림(사실은 벽화인 프레스코화)은 나폴리 부근에 있는 스타비아(Stabia)라는 마을에서 분위기가 비슷한 다른 2개의 그림과 함께 발견되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베를린 페라가몬박물관에 있는 선물가게에서 그림엽서로 보았는데, 배경만 파란색으로 좀 다르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주 비슷했다. 그런데 그 엽서 사는 것을 깜빡 잊어먹고 그냥 나와 버렸다.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이 여인을 4계절의 여신인 아우어스(Hours) 중 한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 도록에는 이 세상의 모든 꽃을 주관하는 님프(요정)로 추정하고 있다. 그려진 시기도 서로 다르다. 전자는 기원전 1세기로, 후자는 기원전 3-4세기에 추정하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The History of Art - 한글판 영문판 모두 112페이지>에서 처음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다.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꼭 원본을 보고 싶었다. 박제화된 <모나리자>보다는 살아있는 이 처녀가 훨씬 더 좋았다. 그래서 나폴리에 갔을 때, 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몇 년이나 기다리다가 가슴 졸이며 만나러 찾아 갔는데, 그녀가 약속 장소에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얼마나 허망하던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폼뻬이 고대 유물 특별전>에 출장을 나가셨단다. 그러면서 전시 기간까지 알려주었다. 다행히 그 전시가 오늘까지 열리고 있어서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진 촬영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지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일본 나라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에서 <금당벽화>와 <백제관음>을 찍었을 때처럼.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갔을 때, 그 곳의 아이콘(대표선수)이 그 자리에 없으면 맥이 빠진다. 아이콘 하나만 보아도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 아이콘을 보았을 때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다른 작품은 다 보지 못하고 나와도 조금도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다.

그림은 따로 분리되어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대영박물관은 전체 규모는 루브르보다 좀 작은 거 같다. 내가 보기에 대영박물관은 이집트와 그리스 유물 모두 루브르박물관에 비해 약했다. 반면에 앗시리아 유물은 매우 우수했다. 앗시리아의 사자 사냥 부조는 생동감이 넘쳐 이틀에 걸쳐 두 번이나 찾아갔다. 죽어가는 사자들의 다양한 묘사가 일품이었고, 사냥 과정을 연속으로 묘사한 솜씨가 대단했다. 그리스 유물도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에 비해 더 약했다. 페르가몬박물관에서 장엄한 페르가몬 신전을 이미 보아서 그런지, 그리스 신전(부분)에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 조각들도 페르가몬 신전이 더 웅장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대리석 유물들을 (이 유물들을 그리스에서 가져온 엘긴경의 이름을 따서) 엘긴 마블스(Elgin Mables)라고 하는데, 지금 그리스 정부가 반환을 요청하고 있는 바로 그 유물이다.
 
정말 이런 인류의 보물을 약탈해다가 잘 보존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여주는 것을 칭찬해야 할까 비난해야 할까. 현재 유럽의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대부분 식민지 개척시대에 약탈해온 것이므로, 당연히 가져 온 국가에 돌려주어야 한다. 이집트 유물은 이집트에, 그리스 유물은 그리스나 터키에,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유물은 이라크나 해당 국가에 하루라도 빨리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나라들은 완강하게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아직까지 프랑스로부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 페라가몬박물관, 비엔나 왕궁박물관에서 본 이집트 유물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서, 이렇게 강대국들이 다 가져오면 그 나라에는 뭐가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 설 정도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호기심을 끈 유물은 내가 '미스 브리티시 뮤지엄'이라고 이름 붙인 여자 부처상이다. 8세기 스리랑카에서 제작된 불상인데, 이름은 'The Goddess Tara'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타라 보살상> 정도 되겠다. 머리에 화관을 이고, 눈을 지긋이 내려 감고,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살짝 치켜든 채, 오른쪽 엉덩이를 약간 뒤로 뺀 채, 우아하면서도 정말 섹시한 포즈로 서있다. 섹시하면서 천박한 조각은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섹시미를 물씬 풍기는 조각상은 처음 보았다. 특히 이 여신상의 터질 것 같은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탱탱한 엉덩이는 정말 매력적이다.
 
이 보살상이 매력적인 것은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인 여자 냄새를 풍긴다는 점이다. 이 동양 미인의 대표 선수 <타라 보살상>을 루브르에 있는 서양의 대표 미인 <밀로의 비너스>와 비교해보면 금방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적인 <타라 보살상>에 비해 <밀로의 비너스>는 조각의 냄새가 난다. 쉽게 얘기하면 <타라 보살상>은 시람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비너스>는 여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시대의 조각상이 조형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조각상을 만들 때, 실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조각상에서 인간이 아니라, 신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피렌체 아카데미아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아카데미아의 주인공이자, 서양 미남의 대명사 <다비드-다윗>보다도 그 앞에 나란히 서있는 노예상 등 7개의 조각상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정감이 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로댕도 로마에 와서 이 작품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의 일부 작품들이 미켈란젤로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저녁에 피카딜리극장 앞에서 아내를 만났다. 피카딜리 거리에는 많은 연극 전용 극장들이 있었다. 레미제라블, 라이언킹, 맘마미아도 공연 중이었다. 이게 영국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간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연극만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리는 그중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하기로 했다. 나는 영화 <오페라의 유령>을 매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셀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그래도 연극의 본토에서 오리지널로 보고 싶었다. 티켓은 내가 대영박물관에 있는 동안 아내가 예매를 해두었다. 피카딜리에서 연극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극장 분위기가 궁금했다.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모차르트의 <마적-마술피리> 관람하던 그런 들뜬 기분이었다. 49파운드(10만원)나 주었지만, 제일 안 좋은 좌석이어서 무대 전체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공연은 재미있었다. 남자 주인공 유령과 여자 주인공 크리스틴이 처음 만나 부르는 첫 듀엣은 배경과 노래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불빛을 배경으로 유령과 크리스틴은 환희와 사랑의 노래를 힘차게 부른다. 정말 감동적이어서 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게 직접 보는 공연과 영화로 보는 공연의 차이구나....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음악도 아주 리얼했다. 그러나 영화에 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디테일이 좀 부족했다. 몇 장면을 더 삽입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크리스틴이 라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숨어서 엿들으면서 질투에 몸을 떠는 유령을 묘사하는 장면 같은.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유령과 크리스틴의 안타까운 운명적인 사랑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튼 정말 정말 행복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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