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스틸컷. 영주(엄정화 분)의 모습
쇼박스
김윤석 감독, 이보람 공동 각본의 영화 <미성년>은 서사, 연출, 연기, 캐릭터의 입체성 등 다양한 면에서 꼭 기억하고 싶은 영화다. 모든 장면을 하나하나 곱씹고 싶지만, 유독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영주(염정아)는 남편의 외도에 이혼을 결심하곤 집안의 각종 재산 서류를 뒤진다.
바닥에 펼쳐진 서류뭉치 앞에서 영주는 한숨을 쉰다. 지난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일군 재산 명의가 모두 남편인 대원(김윤석) 앞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 그 사실을 마주한 영주는 토하듯 말을 뱉는다. "멍청한 X."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이었다. 영주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비난의 화살은 나쁜 놈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향한다.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빠가 다른 사람과 바람피우는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엄마는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돼."
최선을 다해 가족을 보살피며 노동한 엄마는 왜 '멍청한 X' 혹은 '불쌍한 사람'이 될까. 영화 속 영주를 기만한 건 누구였을까. 남편이었을까. 내연녀였을까.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영주는 남편 명의로 채워진 서류 앞에서 억울하지 않았을까. 어떤 노동은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돈, 예술, 인정, 명예가 되고, 어떤 노동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한 번에 수십 가지 작업을 수행하는 고도의 전문적인 노동 경력임에도 가족을 벗어나는 순간 이력서 공란만 남는다. 살림과 돌봄을 여전히 엄마의 본성(모성)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일상을 채우는 노동은 쉽게 삭제된다. 본성이 아니라 노동이고, 당연한 게 아니라 부단히 애쓰는 거라는 걸 모른다. 그 자리가 비어봐야 상대도 조금은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돌봐주던 끊임없는 노동을.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였던 전영자씨의 인터뷰(우먼센스)를 읽었다. 남편은 글을 썼지만, 그녀는 다방면의 전문가였다. 43년 동안 가정의 조력자, 가사노동자, 요리사, 간병인, 은행원,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남들에게는 '보살'로 불렸지만, 자신을 '계집종'이라 생각했다는 그녀는 더는 이런 내조를 하기 싫다고 말한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죠. 지난 43년은 다 행복했고 다 지겨웠어요."
남편의 외도와 혼외 자식, 매일 같이 차려야 했던 수십 명의 밥상과 술상. 인터뷰에 적힌 글자들이 잔혹해 보였는데, 정작 그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거나 자기를 멍청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시간을 끌어안으면서도 정확하게 지금 원하는 걸 말했다.
"이외수의 아내로 존재했던 제가 이제는 저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곧 다가올 5월은 가정의 달. 평화롭게 전시되는 화목한 가정은 가혹한 노동을 야금야금 먹으며 유지된다. 꾸역꾸역 가족 행사를 치르던 예전보다 엄마는 백숙, 나는 짬뽕을 시켜 먹는 각자의 시간이 훨씬 평화롭게 느껴진다. 자기 자신을 미뤄두지 않으려는 엄마의 욕망 앞에서 비로소 내 죄책감도 사라졌으니까. 엄마는 더는 내가 지킬 존재도, 멍청한 존재도 아니니까.
가족 내에서도, 가족 밖에서도, 이별 후에도 엄마의 삶만 일방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5월이면 좋겠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질 거라는 전영자씨의 말을 진심으로 믿기로 했다.
"이 나이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60대 여성도 싱글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줄까, 많은 생각이 들죠. 중년 여성들이 이런 이유로 이혼을 결심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잘해내고 싶어요. 어떻게든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