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기명절지도’
선문대박물관
장승업은 그림 실력이 늘자 광통교 서화 시장의 거간들과 가까이 지낸다. 그의 그림은 인기가 많아 많은 이들이 찾았다. 당시 광통교에는 청계천을 따라 시장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중에는 서화 가게도 여럿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 광통교의 상업도 많이 발전하였고 그에 따라 서화 가게도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처음에는 민화와 같은 조선의 장식화가 많이 거래되었으나, 점차 화원 급 화가들의 정통화도 거래되었다. 더욱이 도화서가 무너진 뒤로는 여러 화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의 서화 애호가들은 김홍도 화풍의 그림을 좋아하여 김홍도의 그림의 아류들이 제작되어 많이 팔리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점차 중국과의 교류가 많아지며 중국 미술품들도 들어와 판매되었다. 이런 흐름은 중국화풍의 그림을 잘 그린 장승업에게 큰 도움이 되어 더욱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와 '영모도'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었다.
장승업은 주로 청나라 상해화파들의 그림과 유사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솜씨는 중국 화가들 못지않아 나중에는 중국 화가들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당시 부자 서화 수장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장승업의 그림을 찾았다. 그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는 말은 너무 많은 주문을 받다보니 정성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리다 어느 한 부분을 빠뜨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 번은 말을 그리다 다리 하나를 안 그린 적도 있고, 어떤 때는 꽃을 그리다 꽃과 줄기만 그리고 잎 그리는 것은 잊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낙관도 자주 잃어버려 근처에 살던 전각가 오세창이 다시 새겨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장승업의 기행
장승업은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기행으로도 유명하였다. 특히 술과 여자 이야기는 늘 따라 다니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는 술과 여자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동안은 반드시 옆에 술과 여자가 있어야 했다. 그만큼 음주와 여색은 그에게 일상생활과 다름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나 술을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어 혼절하거나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대신 적당히 계속해서 마셨다. 그러니 술에서 깨어나는 일이 없으니 늘 취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매에 술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술이 깨면 꺼내어 마시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취하지 않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술 때문이지 그의 얼굴은 약간 기름진데다 서양 사람처럼 노란 동공을 가지고 있었고, 술독 때문인지 우뚝한 코가 늘 불그스레하였다. 코 아래로는 늘 수염을 길러 개성 있는 얼굴이었다. 생김새가 그다지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예술가다운 어떤 상서로운 기운이 돌아 훤해 보였다. 그는 또한 옷차림새로도 유명하였다. 늘 비취색 같은 푸른 색 창의(彰衣)를 입고 다녀, 멀리서도 그가 보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림 주문에서도 그는 특별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의 집 앞에는 늘 그림을 찾는 사람으로 들끓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었지만,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와서 억지로 무례하게 그림을 청하면 목숨을 걸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은 40이 넘어서야 겨우 아내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첫날밤만을 보내고 얽매이는 게 싫어 도망가 버린다. 그렇게 유랑의 삶을 살았지만 전혀 여인과 가정을 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여쁜 여인과 함께 종로 탑골 공원 맞은편인 관수동 지역에 살았다는 말도 있었고, 또한 한동안은 창덕궁 남쪽 원남동에 거주하였다고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장승업이 여인을 꺼린 것은 아니고 집안에 묶여 사는 것이 힘든 성격이었던 것 같다.
화원 시절의 장승업
광통교에서 장승업의 이름이 높아지자 화원으로 추천되어 궁중의 그림을 맡아 그리게 되었다. 장승업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안 임금 고종은 병풍 여러 첩을 그리게 하고 하루에 두어 차례씩만 두서너 잔의 술을 주도록 하였다. 장승업은 얼마 동안은 견디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채색을 사오겠다고 거짓을 고하고 야반에 탈주하여 잘 다니던 술집으로 도망갔다. 결국 임금에게 들켜 잡혀 들어와 더욱 경계를 강하게 하였더니, 이제는 감시하는 포졸들의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고종은 매우 화가 나 그를 잡아다 가두어 버렸다.
임금이 장승업을 제어하지 못하자 민영환이 나서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민영환은 장승업의 옷을 몰래 감추고 술과 안주를 넉넉히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장승업은 한동안은 또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시장 통의 술집을 그리워하였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춤이 있는 술집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다시 감시하는 사람이 조는 틈을 타서 몰래 도망가 버리고 만다. 자유로운 성격의 장승업에게는 민영환의 집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장승업에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어두운 감옥과도 같았다.
장승업의 회화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