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선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역하고 있는 한정화씨.
Tsukasa Yajima
- 1978년 독일로 떠나기 전 한국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 살았었다. 어렸을 때 충정로2가쯤에 있는 육교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전차들이 있었다. 그때는 미군에서 쓰던 지프차에 색을 칠해서 택시로 사용했었다. 반공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나고, 반공 웅변대회에서 상도 탔었다. (웃음)'
중학교 때 한 학급에 80명 정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서울 태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80명 중에 나를 포함해 딱 2명만이 서울에서 태어난 학생이었다. 전쟁 때문에 이민과 이주가 그만큼 많았던 때였다. 살던 지역에서 뿌리 뽑힌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연희중학교에 다녔을 때 어느 날 국어선생님이 잡혀갔던 기억도 난다. 국어선생님이 '북한에도 좋은 책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 것을 학생이 부모님께 얘기하는 바람에 공안경찰에게 잡혀간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선생님이 나에게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시켰다. 당시 정부가 잡곡밥을 먹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의 도시락이 흰 쌀밥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잡곡밥과 흰 쌀밥의 비율(%)을 적어야 했다. 돈이 없어서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시대였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당시 <코리아 타임즈>의 논설위원이셨던 아버지는 검열을 못 견뎌 빨간 글씨로 퇴직서를 내던지고 나오셨다. 그 후 집에서 영어로 기사를 쓰시거나, 번역을 하셨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늘 귓가에 들렸다. 아버지는 영어를 하려면 자기 키만큼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는 파독 간호사에 지원을 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집에 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버지는 내가 하자는 대로 놀아주고 항상 궁금한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정말 즐거웠다. 어머니는 어머니 집안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침 어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에서 가족들이 피난을 가면서 전주 간호사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한국에 있을 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흑백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독일에 어머니와 살게 된 후의 기억은 모두 컬러사진처럼 기억된다."
"한국 사회 소식, 울면서 번역했다"
- 지금처럼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에 여행 가방 하나 들고 독일에 왔다. 겨우 16살이었는데 이후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독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또는 프랑스어 등 3개 국어가 필요했다. 1978년 처음 도착했을 땐 독일어와 라틴어를 동시에 배워야 했다. 그렇게 1984년부터 대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교육과정에서는 한때 왕따를 경험하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자 아시아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16살에 독일에 왔기 때문에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일에 온 후로 사람들은 나에게 늘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어디서 왔니?' 그때마다 나는 참 열심히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내게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 내가 대학 생활 중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변사람들은 학업 때문에 임신중지를 해야 한다고 권했지만 괜한 오기가 생겼고 첫째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강의실이든 행사장이든 어디든 갔었다. 그러면서 대학에 탁아시설을 만드는 운동도 했었다. 독일 사회도 내 아이를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고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80년도 초반 어느 날, 내가 아직 카톨릭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였다. 한국에 있는 중학교 동창이 대학을 그만두고 구로공단의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5.18 관련 카세트 테이프를 들려줬다는 죄로 수감돼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못 하고 독일에서 잘 지내는 내가 죄인처럼 느껴졌다."
- 낯선 언어와 문화, 사회에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치열하게 살아야 했을 텐데, 한국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1978년까지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다가 1987년에 서베를린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분단체제였기 때문에 분단된 도시였던 서베를린만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자연스럽게 베를린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데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베를린의 한인단체인 '민협(민족민주운동협의회)'에서 의뢰한 번역을 돕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간첩이 되었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남영동 고문사건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민낯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 기사를 독일어로 번역을 했는데, 정말 울면서 번역했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기사 속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한국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6살에 독일에 온 후 단 한 번도 한국에 가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1991년도에 장학금을 받아서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고, 동두천 기지촌여성들을 리서치하게 되었다."
"당신은 울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