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희훈
글을 읽다 보면 시나브로 우리는 백 선생의 목소리로 듣게 된다. 상자 속의 물건을 흔들어서 가늠하는 것에서 잘 나타나듯, 듣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그 된깔(본질)을 헤아리는 것이다.
월터 J.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서술한 대로, "문자시대의 독자는 홀로 눈으로 읽으면서 작품을 객관화하면서 시각적 분할에 충실하게 읽는다면, 구술문화 시대의 청중은 함께 참여하며 소리를 들으면서 청각적 총합과 공동체적 참여를 하기 마련이다." 이에 우리는 백 선생으로부터 버선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땅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버선발의 현장에 함께 참여하여 더불어 울고 웃고 분노하게 된다.
이 소설은 민중 언어의 부활이자 민중 사상의 복원이다. 백 선생의 말씀대로, "전 세계를 통틀어 민중사상이나 문화를 기록한 건 거의 없어. 인류 역사는 민중을 죽인 역사야. 이것을 서술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진짜 사람이 가져야 할 희망의 실체, 민중의 역사적 실체를 기록하고 싶었어. 민중사상의 원형이 버선발이야."
한국의 소설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어와 한자어 없이 한 편의 장편소설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미 '새내기', '동아리' 등의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전에 올려놓은 바 있는 백 선생은 외래어는 물론 이미 입말이 된 한자어마저 순수한 우리말로 전환하여 기술하였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밀크'로 부르거나 '쇠젖'으로 말할 때 차이에서 잘 드러나듯, "언어가 세계의 형식을 규정하"기에 낱말에는 그 말무리들의 든메(사상)와 새름(정서)이 담겨 있다. 선생은 잊히고 사라진 민중언어를 부활시키고, 여기에 관념이 아니라 니나들의 삶과 노동현장에서 우러나온 민중사상을 담았다.
그 사상의 알짜란 '내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주인들의 탐욕일 뿐이고 민중들은 너나 구분 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잘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끼리의 공동체만을 바라지 않는다. 모든 자연의 생명과 공존을 모색한다. 일하는 자들은 땅에 떨어진 인간의 땀은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것, 자연의 것이라고 깨닫는다.
이 소설은 목숨을 건 한 살매(일생)의 투쟁을 기록한 서사다. 작가인 백 선생이 평생을 걸쳐 거리의 투사로 이 땅의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위하여 거의 죽음에 이를 지경까지 고문과 투옥을 당하면서 투쟁한 역사의 기록이자, 지난해 9시간에 이르는 심장수술을 치르며 병상에서 목숨을 걸고 쓴 절명시(絶命詩)다.
이 소설에서도 버선발과 개암이는 그리 투쟁한다. 버선발은 머슴살이를 피하려고 산골짝에 살다가 잡혀가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비상한 힘을 갖게 된 후에는 니나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고 사는 이들을 응징하며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바다를 땅으로 바꾸고 임금을 죽인다. 주인에게 다리가 잘린 채 몸통과 팔만 남은 개암이는 버선발에게 말한다.
"그 떼땅꾼(땅부자) 놈들 그것들은 말이야, 사람을 죽여서라도 내 거만 만들면 된다는 마구잡이 가이새끼(개새끼)들이야. 그러니까 나한테서 빼먹을 것은 다 빼먹었으니 그네들의 뚱속(욕심)에 따라 내 몸뚱이를 갖다가서 그 넓은 늪을 메꾸는 한 줌 흙으로 내던져버린 거라구. (중략) 하지만 버선발아, 내가 겪어보니까 말이야, 죽음이란 깜빡(순간)이 아니더라구. 목숨을 건 한살매(일생) 싸움이더라구. 죽음까지 먹어치우는 먹튀(침묵)하고 외로이 맞붙는 한판 싸움이더라니까."(본문 112쪽)
혼신을 다해 쓴 소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
이 소설은 땅의 갈마(역사)이자 혁명의 서사다. 선생이 평생 꿈꾸고 싸워온 대로,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썩은 문명, 내 것을 갖고자 타인을 수탈하고 폭력을 가하는 자본주의를 바로 사람의 힘으로 해체하고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이 되어 '노나메기'를 이루려는 희망을 버선발의 행적을 따라 서술한 한바탕이다. 니나들이 땅을 갈고 가꾸어 숱한 생명을 키우기에 땅의 주인은 마땅히 그들이거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서 내 것이라 주장하며 오히려 니나와 생명을 죽여 왔다.
버선발은 이에 맞서서 어머니를 비롯한 민중들의 분노를 모아 발 구름을 하여 바다를 없애 땅으로 바꾸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내주어 모든 이들이 다시 평등하게 땅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노나메기를 만든다. 그 노나메기는 어디서 왔는가. "자네 같은 니나, 그들이 흘린 그 박땀, 그 안간 땀, 그 피땀의 갈마(역사)에서 스스로 깨우친 것이라네. 그러니까 노나메기란 우리 사람의 참짜 꿈인 바랄이요, 온이(인류)의 하제(희망)"이다.
버선발은 노동을 하면서, 주인에 맞서서 피를 흘리고 싸우며 스스로 깨우친다. 버선발은 깨우침에 머물지 않고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 한숨까지도 수탈하던 납쇠, 쫄망쇠, 뼉쇠, 임금을 다 죽이고는 마침내 벗나래(참세상)을 연다.
이 소설은 한바탕 춤이다. 백 선생은 그 노나메기를 싸움만으로 이루려 하지 않는다. "춤이라는 게 제 삶, 제 한살매에서 나오는 바투(현실)요, 나아가 어기찬 꿈"이다. 버선발은 굿판에서 배를 땅에 깔고 온몸으로 자신의 한 맺힌 삶을 하나도 남김없이 몸으로 빚어내고 판으로 일구어 춤으로 표현한다. "사람의 뜻은 채가 되고 사람의 마음은 긴북(장구)이 되어 가분재기 휘몰아치는 휘몰이, 그게 바로 이 벌개(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 따위는 발칵 뒤집어 엎어버리고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벗나래(참세상)를 만들려는 몸짓, 그게 춤"이다.
그런 춤이야말로 혁명을 이루는 바탕이자 혁명이 바로 춤이다. 니나들이 서럽고 한 맺힌 중에도 이를 승화하여 "니나노∼늴리리야∼늴리리야∼니나노∼"라고 춤을 출 때 삶과 투쟁, 예술과 혁명이 하나가 된다. 그것만이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노나메기의 새 하늘을 열 수 있다.
이 소설은 백기완이다. 비유를 위해 과장한 것과 우의(allegory)를 덜어내면, 버선발은 바로 백 선생 자신이다. 버선발이 산골짝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는 길은 선생이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월남한 여정이며, 버선발이 주인, 납쇠, 쫄망쇠, 뼉쇠, 임금과 싸우는 이야기는 선생이 독재정권의 수괴인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와 재벌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