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상 <자화상>(1955). <이봉상화집>(1972, 한국문화사)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문선호
갑작스런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그곳에는 이중섭, 장욱진, 손응성, 이규상, 한묵, 백영수 등 동년배 친구들이 생활 방책을 강구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너나없이 힘든 시절 이봉상은 초상화를 그려 팔기도 하며 힘든 시절을 이겨 나갔다. 이봉상은 박고석, 손응성, 김병기 등과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전쟁 중 마침 종군작가단이 만들어지자 많은 화가들이 참여하였다. 이봉상도 종군하였는데, 군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가관이었다고 한다. 친구 박고석의 증언에 따르면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한 이봉상이 작업복 위에 미군 장교 코트를 걸치고 일본 병정처럼 전투모를 쓴 모양이 마치 가짜 패잔병 같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이봉상은 미술단체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50년 미협', '기조전(其潮展)', '창작미협(創作美協)', '신상회(新象會)', '구상회(具象會)' 등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또한 미술교과서 편찬과 비평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후진양성에도 앞장선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 시작하여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거쳐 심사위원을 지내며 미술계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이봉상의 작품 세계
이봉상은 어려서부터 조선미전에서 최연소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고 작품의 수준도 뛰어나 늘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작품 활동이나 미술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상하게 동년배 화가들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중섭, 유영국 등과 동갑으로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음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이봉상이 이상하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큰 어려움 없이 화단에 자리 잡아 무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성격 또한 매우 원만하여 미술가임에도 특이한 기행을 일삼지 않아 남의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