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숨은 사연이 있는. 보은

송파문화원 역사탐방 한글창제의 숨겨진 사연을 찾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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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정(y2262)등록 2019.03.21 08:36
매월 한 번씩 회원 모집을 하여 떠나는 3월 송파문화원의 역사 탐방기행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다는 충북 보은을 선택하였다.
 
2019년 3월 15일 약속시간인 아침 8시, 선착순으로 신청한 40명중 한사람도, 1분도 늦지 않고 대기 중인 버스에 승차한 것을 보면서 대부분 60세 이상의 참여자들 열의가 대단함을 알 수가 있다.
 
서울외곽 순환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당진영덕 고속도로를 달려 먼저 보은군 장안면 우당 선정훈의 고택에 도착하니 보훈 문화원 이사이며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는 박 진수씨가 기다리고 있다.
 
박진수씨의 해설에 의하면 우당 선 정훈은 전라도 보성 선씨로 전라도 거문도에서 선주로 무역을 하여 만석꾼이 되어 3.1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만석의 재물을 가지고 이곳 보은의 보습산 아래까지 명당을 찾아 와서 당대 최고의 목수를 동원하여 민가로써 지을 수 있는 최대 가옥 크기인 99칸의 대저택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충청도까지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이전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선정훈의 부친이 소작 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그들이 감사표시로 세워준 철제 시혜비나 선 정훈에 대해 어디에도 친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과 후학양성을 위해 교육사업에 정진한 점을 볼 때 금세기 재벌들에게 본 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선정훈 고택 99칸의 우당 선정훈 고택의 사랑채 ⓒ 양동정

   

선정훈시혜비와 공덕비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고마움표시로 거문도에 세워졌던 철제로 제작하여 세워 졌던 시혜비와 선덕비 ⓒ 양동정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로자 신미대사와 속리산 법천암
 
우리가 흔히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창제 초기에는 세종대왕의 지시에 의해 모화사상이 강한 집현전 학사들에게도 비밀에 부쳐지고 세자인 문종. 효령대군.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 왕가의 사람과 유일하게 범어에 능통하며 당시 집현전 학사였던 신미대사만이 알았던 비밀 프로젝트 였다고 한다.
  

훈민정음 공원비 훈민정음창제에 공이 큰 일곱명의 동상을 세우고 속리산에 주로 기거 했던 신미대사를 기리기 위한 공원 ⓒ 양동정

 
세종이 속리산 복천암에 기거하던 신미대사를 만난 것은 형이며 불교에 독실하였던 효령대군의 소개로 만났고, 그를 깊이 신뢰하여 훈민정음 창제 초기부터 많은 의견을 들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자를 놔두고 새 글을 만든다고 하면 모화사상이 누구보다 강했던 집현전 학사들이나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만들어 보지도 못했을 것을 미리 예견한 세종대왕은 안진치료를 위한 초정약수 방문도 신미대사와 의견을 나누기 위한 행차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신미대사에게 세종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우국이세 혜각존자" 라는 긴 법호를 남길 정도였고 그가 칩거했던 속리산 복천암를 세조가 왕이 되어 찾아오기도 했을 정도로 3대에 걸쳐 신뢰를 받은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신미대사의 역할이 그만큼 지대했다는 뜻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발 빠른 보은군에서는 훈민정음 마당을 조성하여 세종대왕과 신미대사 효령대군 등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큰 7명의 동상을 세우고 훈민정음공원을 만들어 거룩한 뜻을 기리고 있다.
  

훈민정음 공원 내 동상 훈민정음 창제 공이 큰 7명의 동상 ⓒ 양동정

 
속리산 법주사
 
보은 하면 누가 뭐래도 속리산 법주사를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왕봉을 주봉으로 하는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고도 부르며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중 하나로 제2금강 소금강으로 불릴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여 대소 사찰이 곳곳에 소재하고 있다.
특히 법주사는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절로 국내유일의 목탑이며 국보인 팔상전을 위시하여 쌍 사자 석등 등 국보 3점이 있다. 그 외에도 동양최대인 33M 높이의 청동불상을 비롯한 많은 보물 13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높이 1.2m, 지름 2.7m, 무게 20톤인 철 솥은 한꺼번에 쌀 40가마의 밥을 할 수 있었고 3,000승도가 먹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솥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무엇에 썼으며? 어떻게 옮겨 왔는지?... 등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때 지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철 솥이다.
그야 말로 불가사의가 아닌가 싶다.
또한 1462년에 세조가 보은을 왔을 때 소나무가지가 가마에 걸리지 않도록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정2품송이 있고, 법주사 일원의 세조 길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자연 생태 보존상태가 우수한 곳이기도 하다.
  

호서제일가람문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 양동정

   

법주사 전경 속리산 구봉을 배경으로 국보인 팔상전과 동양최대의 청동불 ⓒ 양동정

   

철솥 한꺼번에 쌀 40가마의 밥을 지을수 있다는 철제 솥으로 돼? 어떻게? 무었때문에? 만들었는 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2.5톤 무게의 철솥 ⓒ 양동정

   

정2품송 세조가 지나갈때 나뭇가지를 들어올렸다 해서 정2품 벼슬을 내렸다는 잘생긴 소나무 ⓒ 양동정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보은읍 어암리에 소재한 석성으로 신라시대 자비마립간 13년(470년)에 축조되었으며 3년 만에 완성하였다 해서 삼년산성이라 하며 우리나라에 축조 연대가 정확한 석성은 이곳 밖에 없다고 한다. 해설사 해설에 의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다 큰 돌담을 보고 "저렇게 큰 돌무더기가 무엇이냐?.." 고 물은 후 내용을 파악하여 보고하니 복원을 명하여 복원했는데 시멘트를 일부 사용한 것이 아쉽다고 한다.
  

삼년산성 신라시대 축성연대가 확실한 석성으로 북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성 ⓒ 양동정

 
이번 달도 역시 송파문화원 역사 탐방에 참여한 인원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고령이지만 참여 열기가 대단해 춘삼월에 퍼붓는 우박에도 일회용 우의를 입고 해설사의 해설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이 분들에게는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탐방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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