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주의의 망령과 영웅이 된 전두환

무엇이 전두환을 영웅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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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빈(qls321)등록 2019.03.14 17:43
최근 들어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 앉는 일은 소위 '셀프고문'과 다르지 않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답답한 한숨을 푹 쉬고 나면 그만이었는데 근래에는 그에 공포가 더해졌다. 그것은 내 눈앞에서 벌어질 일이 아니었으며, 이 땅의 풍토를 일구는 동료 시민들이 결코 내버려 둘 일도 아니었다.

'극우주의'. 이는 남루한 쪽배에 몸을 싣고 유럽을 향해, 일말의 정의가 허락된 곳으로 자기 생을 던진 이들에게 날아와 꽂히던 무자비이다. 자신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다하고 있는 남미 카라반 탑승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가로지르는 국경장벽이다. 과오를 되돌아볼 줄은 모른 채 정신승리의 역사를 새기는 일본 정부의 뻔뻔함이다. 이런 부류의 이미지가 내 개념 속 극우주의의 모습이었다. 그보다 근저에는 역사책을 빼곡하게 메운 먹물의 형태로, 활자의 모양으로, 겪어 본 적 없으나 본능적으로 지닌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막연히 내 안에 있었다.

2019년 3월, 비로소 나의 언어와 나를 닮은 이들의 형상으로 극우의 얼굴을 그려내게 되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갑옷 삼아 '배은망덕한' 정권의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는 이들은 이제 언론을 넘어 국회를 휩쓸고 역사의 물길마저 거스르고 있다. 3월 11일 광주를 찾은 전두환은 태극기를 아로새긴 자들에게 가련한 영웅이었다. 조국 중흥의 영웅을 구출하기 위해 목놓아 소리치는 이들은 부끄러움이 없다. 그곳은 1980년, 저들의 수치스러운 발언마저도 인간의 권리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피를 흘린 자들의 땅이었다.

어쩐지 불안하기는 했다. 연일 터져 나오는 보수 국회의원들의 혐오 발언과 색깔론은 분별 있는 시민을 향한 설득의 외침인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말을 실천으로 옮길 극성 지지층을 거리에 집결시킬 에너지였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언론은 극우주의자의 외침이 벽지에까지 닿을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언론이 아젠다를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여론인 듯 보이고, 다수 의견으로 둔갑하는 법이다. 다수란 언제나 익명성을 부르고, 익명성에 숨은 자 무서울 것이 없다.

언론도, 정치권도 극우의 망령이 여론의 탈을 쓰고 사회 깊숙이 스미는 동안 "혐오 표현이, 타인의 삶을 왜곡하는 행위가 왜 공론장의 영역에서 지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사실과 거짓을 가르고 진실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억울한 이는 없어야 하고 억울할 이 또한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가 왜곡과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현해도 문제 삼지 않는 사회라면, 그 행위를 수치로 여기게 만드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수치스러워야 할 언동이 서슴없이 펼쳐지는 동안 그 내용에는 분노했을지언정 그를 입 밖에 내는 행위의 천박함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혐오와 왜곡의 발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그 발화의 내용은 힘을 얻는다.

천박함에 대한 묵시는 전두환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영웅이 된 전두환은 극우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잘못을 묻는 기자들에게 미간을 찌푸렸고, 호통을 쳤다. 그날 그는 자기 군대에 쓰러져간 사람들의 땅에 있었다.

정치권의 부끄러운 발언에 특종을 쫓는 언론이 힘을 보태고, 무관심한 대중이 여지를 주었다. 극우주의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틈새를 파고들어 둥지를 틀었다. 발붙일 땅이 있으니 활개를 치려 한다. 박근혜의 탄핵이 부당하다 했고, 이제는 전두환을 영웅이라 부른다. 전두환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이 될 수 없다. 이 사회의 풍토를 일구는 시민들의 수치심이 그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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