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념 없으면 안 됩니까?

리뷰] 김영선,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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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주(gotozoo3)등록 2019.02.25 17:05
5시 58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분침이 숫자 12를 정확히 가리키기를 기다려 일어섰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싹싹하게 인사까지 건네며 퇴근,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신입사원의 오만한 패기였음은 그 다음날 선배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았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10년 전 나와 같은 이들은 '패기있네' 라고 비꼬임 당하거나 '개념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 감히 선배들은 야근을 하는데 감히 윗사람이 퇴근을 하기도 전에....등등의 이유로 칼퇴는 금기시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칼퇴를 유지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애사심이 없다' 거나 '회사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에게 야근은 곧 회사에 대한 헌신이자 근면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는 노동자의 과로를 살펴보면서 왜 노동자의 과로가 개선되지 못하는 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의미 있는 책이다. 책의 초반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과로사는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책에 의하면 아주 낮은 통계로만 잡아도 하루에 1명이상이 과로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과로사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은 요원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제도적 개선이 요원한 현실에 대해서 "왜?" 라는 질문과 함께 신자유주의시대의 근면신화 라는 답을 내리고 있는 점이다.
 
책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시대의 근면신화는 철저히 자기개발의 논리에 따른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면신화는 강제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부과되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계발의 논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진단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을 스스로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시대의 근면은 개인성과와 실적의 형태로 표시된다. 그렇게 휴식과 쉼이 죄악시 되었고 칼퇴는 개념 없는 행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같은 근면신화는 결국 과로자살이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낸다. 매일 서로성과전쟁을 벌이도록 만드는 경쟁구조는 극도의 스트레스, 불안, 절망감 등은 사람을 극단으로 내몬다. 2015년 일본에서 자살한 광고회사 신입사원이 남겼다는 "이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다.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매일 다음날이 오는 게 무서워 잘 수 없다. 살기 위해 일하는지 일하기 위해 사는지 모를 때부터 인생이다"라는 마지막 말은 극단으로 내몰린 사람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이 신입사원은 한 달에 105시간을 넘는 초과근무를 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같은 사회는 디스토피아 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개선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의 민주화, 시간권리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우리의 현실을 만날 때 책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시계를 잠시 며칠 전으로 돌려보자 연평균 2000시간이 넘는 최장시간의 근로시간, 연이은 과로사의 문제들 지난해 추진되었던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는 정부와 노동자를 착취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경영계는 탄력근로제를 6개월 연장하는 합의를 했다. 이 합의로 인해 3개월은 주당 64시간까지 근무를 늘릴 수 있다. 3개월 12주의 주당 노동시간 64시간의 지독함은 우리가 말하는 그것이 만성과로 인정기준인 12주 연속 60시간을 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과로가 미덕이 되는 사회에서 자율성은 과로를 막지 못한다. 그래서 법의 강제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과로가 미덕이 되지 않게 야근이 실적과 인격으로 평가되지 않게 최소한의 장치를 법을 마련하는 것이 주52시간제의 취지였다. 우리가 스스로 '개념 없기'가 어렵다면 법이 우리를 '개념 없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합의로 또 한 번 개념 없이 이 세상을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다.
 
노동자의 목숨으로 노동자의 몸으로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성과 그 성과로 버텨나갈 수 있는 사회라면 이미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생산성은 희생으로 헌신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혁신으로 얻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강남, 여의도의 내과나 이비인후과 등을 방문해 본적이 있는가? 그곳에 가면 입구에 각종 비타민주사, 숙취해소주사, 피로 회복주사를 놔준다는 문구가 즐비하다. 짧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효과를 뽑아내는 게 익숙한 우리들은 주사를 맞아가며 때로는 낮잠카페 등에서 쪽잠을 자고 편의점에서 구하는 에너지 드링크로 잠을 깨워가며 산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여긴다. 어느 극작가의 말을 빌려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인줄 모르고 심지어 노예임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일상과 우리사회는 정말 개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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