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기
홍병기(洪秉箕)는 1869년(고종 6년) 경기도 여주에서 홍익룡(洪益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운회(運晦), 도호(道號)는 인암(仁菴)이다. 서자로 태어난 그는 신분차별로 인해 청년기에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24세 되던 1892년 동학에 입교했는데 이는 당시 시대상황과 개인적 고민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동학에 몸담은 후 그는 고향인 여주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접주로 성장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2대 교주 최시형의 명을 받고 여주에서 임학선(林學善)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수십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다.
1894년 10월 휘하의 교인들을 이끌고 경기도 편의장(便義長) 이종훈(李鍾勳), 편의사(便義司) 이용구(李容九)의 지휘를 받아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忠義包)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黃山)에 도착하였다. 당시 황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는 이종훈 등의 지휘를 받으며 충주에서 삼남선무사(三南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이 이끄는 500명의 관군 등과 대치하였다.
충주군 무극(無極)시장을 거쳐 보은군 장내리로 향하던 그는 충북 괴산에서 관군과 합세한 일본군 수백 명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충주 방면으로 퇴각하자 그는 농민군과 괴산읍내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보은군 장내리로 이동하였다. 이곳에 모인 농민군은 중진(中陣)·선진·후진·좌익·우익 등으로 재편되었다. 손병희는 중진의 통령(統領)을 맡아 농민군을 총지휘하였는데 그는 손병희의 중진에 편제되었다.
이후 그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의 일원으로 공주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이 공주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전주, 금구, 장수, 무주, 금산, 영동, 청주, 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는 손병희·이종훈 등과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신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되자 손병희·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 구출작전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진 못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자 동학은 한동안 김연국·손병희·손천민의 3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후계자 선정과 도통(道統) 문제를 놓고 천도교 내부에서 논란이 생겨났다. 이때 그는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논란 끝에 1900년 손병희가 3대 교주로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자 그는 편의장 직책과 대정(大正)이라는 원직을 받았다. 얼마 뒤에는 손병희로부터 인암(仁菴)이라는 도호(道號)도 받았다. 이후 그는 손병희의 최측근이자 동학 내의 중견인물로 성장하였다.
1901년 손병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목적은 정부의 동학 탄압을 피해 도피할 겸 선진문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당초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유길준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펴낸 <서유견문>을 읽고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중도에 경비 문제로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손병희는 현지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동학의 개화운동을 꾀하였다. 얼마 뒤 동학 교인들의 자녀들을 일본으로 불러 공부시킨 것도 이 일환이었다.
1903년 손병희는 일본 육군참모부의 차장 다무라(田村怡興造) 등과 제휴하여 친러파 내각을 붕괴시킨 후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는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다무라의 급작스런 사망과 손병희의 동생이자 동학 측 연락원이던 손병흠(孫秉欽)의 급사 등으로 인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홍병기는 일본을 오가며 손병희의 명을 받아 시행하였다.
이듬해 4월 홍병기는 임예환·이종훈·나용환·나인협 등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도쿄에 가서 손병희를 만났다. 이때 손병희는 이들에게 국내에 돌아가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홍병기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대동회(大同會)라는 이름의 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후 민회의 명칭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꿨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주장하던 친러 내각을 지지하는 듯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해 10월 '진보회'라는 다시 바꾼 후 동학교인들에게 단발과 함께 흑의(黑衣·개화복)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소위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해 근대국민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보회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책임자로 있던 이용구(李容九)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권을 위해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송병준(宋秉畯)의 유신회와 통합시켜 일진회(一進會)를 발족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이 친일단체로 오해 혹은 매도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1906년 1월 5일 귀국한 손병희는 이용구와 그 휘하의 62명을 출교(黜敎) 조치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동학이 천도교로 거듭난 후 홍병기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주요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1906년 2월 10일 도집(都執)이란 원직(原職)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현기사(玄機司) 고문과원(顧問課員), 이문관장(理文觀長), 경도사(敬道師) 및 직무도사(職務道師), 전제관장(典制觀長), 대종사장(大宗司長) 등에 임명돼 교제 정비와 포교 확대, 교회 정비작업 등을 맡아 처리했다. 1905년 말부터 1919년 3.1혁명 발발 이전까지 그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핵심간부로서 활동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독립운동을 할 것"
1910년 나라가 망한 이래 그 역시 여느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총독부의 한국통치 방식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평소 조선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절실히 염원하였다. 그의 애국심에 불을 지핀 것은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 무렵 천도교에 합류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와 함께 조선의 자치 혹은 독립을 획득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 1919년 1월 상순, 그는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려면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2월에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권동진이 이에 찬성하자 그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권유하였다.
2월 25일경 두 사람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이미 독립선언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던 시점이었다. 권동진은 동지 모집과 독립선언서 인쇄 및 배포가 준비돼 있다고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권동진은 그에게 민족대표로 참가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거사를 코앞에 두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2월 27일 오후 2시경, 그는 종로 재동 김상규의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하기로 돼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천도교 측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5시경, 그는 손병희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천도교 대표인 권동진·오세창·최린·권병덕, 불교 대표 한용운, 기독교 대표 등 10인을 만나 독립선언식 개최 등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언식 개최 장소를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초 예정했던 파고다공원 개최할 경우 일경과의 충돌로 인한 시민들이 피해를 우려해서였다.
마침내 3월 1일이 밝았다. 오후 2시, 그는 태화관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불교 대표 한용운이 인사말을 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그도 다른 민족대표들과 같이 만세를 삼창하였다.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본 관헌이 출동하여 참석자들을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이날로 그를 포함해 민족대표 전원에게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