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한용운(韓龍雲)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한응준(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며,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관리 출신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으로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한용운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주위에서 신동으로 불렸다. 6세에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7세에 대학(大學)을 독파했다고 한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초년기에는 방황과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1892년 14세 때 한용운은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원만치 못했던 것 같다. 둘 사이에서 아들(한보국)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훗날 아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문전박대하였다.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18세 되던 1896년, 한용운은 홀연히 집을 나왔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목하니 노릇, 즉 밥 짓고 땔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하면서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오세암 생활은 갑갑하기만 했다. 게다가 서양문물을 직접 견문하고 싶은 욕구도 생겨났다. 그는 금강경과 목탁을 담은 걸망 하나를 메고 길을 나섰다.
일단 원산에서 배를 타고 연해주로 향했다. 러시아를 둘러보고 만주로 여행을 하던 도중에 불의의 변을 당하였다. 그의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독립군들이 그를 친일단체 일진회 첩자로 알고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이 명중하지 않아 목숨은 건졌다. 첫머리에서 이관구가 말한 '볼에 파인 총탄의 흔적'은 이때 입은 상처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고개가 비뚤어지고 체머리, 즉 머리를 흔드는 요두증(搖頭症)을 앓게 되었다. 그는 두만강을 건너 안변의 석왕사에서 잠시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그의 부친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김연곡(金連谷) 선사를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이후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7년 그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구문물이 범람해 있었다. 1908년 4월 그는 조동종 대학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무렵 메이지 대학에 황실유학생으로 유학을 와 있던 최린(崔麟)을 알게 돼 교제하기 시작했다.
32세 때인 1910년 그는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이는 당시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랄 수 있는데 그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건의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를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면서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맞서 그는 박한영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조선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하고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1913년 5월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책으로 펴내 본격적으로 불교계 혁신운동에 나섰다. 이 책을 통해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 근대화를 주창하였다. 그는 "유신이란 무엇이냐 파괴의 아들이요, 파괴란 무엇이냐 유신의 어머니다. 천하에 어미 없는 아들은 없다고 말은 하되 파괴가 없이 유신이 없다는 것은 흔히 모르고 있다"며 조선불교가 유신(維新)하려면 파괴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불교가 고루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개방된 대중화를 통하여 새 시대에 맞는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1914년 4월에는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간행하고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대전>은 일반인들이 불교경전을 알기 쉽게 풀어 쓴 해설서로 불교 대중화를 위해 쓴 것이다. 이듬해부터 그는 영호남의 주요 사찰들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었다. 순례의 주목적은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10월 그는 조선 선종(禪宗)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했으며, 1917년 4월 <채근담 주해(菜根譚 註解)>를 동양서원에서 출간했다.
'독립청원서'가 아닌 '독립선언서'... 공약 3장 추가
40세가 되던 1918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였다. 당시 출판법에 따르면 잡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종교·학술·문예 분야로 국한돼 있었다. 이 때문에 <유심>은 외형상 불교잡지 형태를 띠었으나 실상은 청년계몽운동을 위주로 다룬 시사종합지에 가까웠다. 그는 서울 계동 43번지에 셋방을 얻어 잡지사 간판을 걸고 혼자서 이 잡지를 만들었다. 비록 3호로 종간되었지만 국내 최초의 문예지 <창조(創造)>(1919. 2)보다도 앞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그 무렵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은 국내 민족진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부터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거사계획이 추진되었다. 한용운은 1919년 2월 말 천도교의 최린과 만나 3.1독립운동 거사계획을 듣고는 즉석에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최린과는 일본에서 인연을 맺어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후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영호남의 사찰에 긴급히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선승이라는 특수신분과 지방의 깊은 산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과의 교통 및 연락 지연 등으로 애로를 겪었다. 결국 연락이 손쉬운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상규) 혼자 서명을 받아냈다. 33인 가운데 불교계 인사는 2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참가로 3.1혁명은 종교계 연합전선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작성 등 3.1거사 초기 단계에서부터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3.1거사에는 서명 등 직접 참여하지는 않겠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 기초를 맡기는 것 자체를 반대하면서 자신이 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국 최남선이 선언서를 쓰게 됐다. 그런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의 명칭을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나서서 '독립선언서'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초고를 써오자 그는 여기에 몇 자 가필을 하고는 '공약 3장'을 추가하였다. 최남선이 쓴 선언서는 손병희의 비폭력 의지가 반영돼 문투가 온건한 편이다. 반면 '공약 3장'은 실천적이며 독립 의지가 뚜렷하게 담겨 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공약 3장 제2항은 나중에 33인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큰 논란이 됐으며 '내란죄' 죄목이 되기도 했다. 선언서 본문보다도 오히려 공약 3장의 파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밤, 그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다. 그는 계동의 자택으로 학생들을 긴급히 소집하였다. 잡지 <유심>을 만들던 곳이기도 한 그의 자택은 3.1거사를 전후한 시기에 그를 따르던 불교계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불교중앙학림(혜화전문학교 전신, 현 동국대)에 다니던 백성욱, 김대용, 오택언, 김봉신, 김법린 등으로 이들은 소위 '유심회' 회원들이었다. 한용운은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각 지역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도 불교계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일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수많은 승려와 신도,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행사 후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서울시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또 각 지방을 담당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 지방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 범어사를 비롯해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 등 주요사찰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동래 일원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가장 규모가 컸다. 이처럼 한용운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을 통해 3.1혁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원래 계획은 한용운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돼 있었다. 2월 26일 최린은 한용운에게 독립선언서 낭독을 의뢰했고, 한용운은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2월 28일 밤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모임을 하던 자리에서 종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학생과 민중들 다수가 집회하게 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빌미로 군경이 탄압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한용운의 인사말 겸 격려사가 끝나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다함께 독립만세 삼창을 했다. 곧이어 인근 종로경찰서에서 나온 일경이 들이닥쳤다. 일행은 손병희를 필두로 다섯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1년 반에 걸쳐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서대문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나중에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