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에 실린 최린의 기고(1906.6.11.) (황성신문)
29세 되던 1906년, 최린은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지적으로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고 기개 또한 넘쳐났다. 1906년 6월 11일자 <황성신문> 1면에 그가 조선청년들에게 충고하는 내용의 '기서(寄書)', 즉 기고문이 실렸다. 천지간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은 학문을 하기 때문이라고 시작하는 이 글은 을사늑약 직후 상심, 비관하고 있던 조선청년들에게 각자가 개화하고 독립하면 그것이 곧 나라가 독립하는 길이라며 학문을 권장하였다.
메이지 대학 시절 그가 애국청년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이 둘 있었다. 당시 일본의 각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정치훈련을 위해 해마다 모의국회를 개최하였다. 1907년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의 왕을 일본 황족으로 하자는 의안을 제출하였다. 이를 접한 유학생회에서는 최린과 문상우 등 대표 2인을 파견하여 학장에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학장은 학생들이 한 일이라 미처 알지 못하였다며 그 의안을 제출한 학생을 퇴학시키기로 해 사태는 수습되었다.
그해 11월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모 흥행장에서 여러 색깔의 국화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는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쓰)라고 쓴 인형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인형 앞에 몸을 굽혀 절하는 인형을 하나 만들어 앉히고는 '朝鮮王來朝', 즉 조선왕이 와서 인사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써 붙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린은 회원들을 비상소집하여 그곳으로 달려가 전시된 인형들을 박살내버렸다.
도쿄 유학시절 최린은 학생단체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한유학생회 부회장·회장을 역임한 그는 1907년 광무(光武)학회 총대(總代·대표), 태극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1908년 2월 일본유학생 단체들이 통합하여 조직된 대한학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09년 1월에는 대한흥학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대한학회와 태극학회, 새로 성립된 연학회(硏學會)를 합쳐 발족하였다.
1909년 9월, 최린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이 벼슬길에 나설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2~3개월 동안 해주·평양 등지를 유랑한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동지 몇 명과 모의하여 서울 주재 외국공사관에 불을 지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국제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를 기화로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을 문제 삼고 나설 작정이었다.
그러나 동지를 규합하던 과정에 발각돼 그를 비롯해 10여 명이 경찰에 구금되었다. 그가 한일병탄 소식을 접한 것은 철창 속에서였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국치(國恥)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게다가 학문을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옷과 구두조차 모두 전당포에 맡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선택지는 해외 망명, 입산, 국내 활동 등 세 가지뿐이었다. 3대 독자인 그는 노부모를 생각해 결국 세 번째를 택하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그에게 독이 됐다.
국내에 남기로 결정을 내린 후 그는 활동무대를 물색하였다. 병탄 전에 민간 사회단체를 전부 해산시켜 그나마 남은 것은 종교단체 정도였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 가운데 천도교를 택했다. 일본에서 쌓은 손병희와의 인연도 있거니와 천도교가 내건 인내천(人乃天),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등의 이념, 동학혁명의 전통 등이 그를 천도교로 이끌었다.
그해 11월, 최린은 보성(普成)소·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 학교는 구한국 정부 고관 출신의 이용익(李容翊)이 세웠다. 이용익은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1907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후 학교가 방치돼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자 천도교에서 경영을 맡게 됐다. 최린은 보성전문학교에서는 헌법·행정법·재정학을, 보성중학교에서는 논리학·수신(修身)을 가르쳤다. 후세 교육이 후일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민족대표 33인의 '재사'
1918년 11월, 4년여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문제가 대두되었고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국 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18년 12월 초순 최린은 천도교인 권동진·오세창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그해 말 세 사람은 조선민족의 자치권 획득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개최 후 해외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독립운동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최린 등 3인은 손병희를 찾아가 독립운동 추진 건을 상의한 후 응낙을 받아냈다. 이들은 독립선언 방식 대신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했다.
그런데 1월 중순경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중인 송계백(宋繼白)이 서울로 와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사전에 알려주었다. 이에 고무된 최린 등 4인은 독립청원 대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에도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를 보내고 윌슨 대통령 윌슨에게는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에 옮기는 일이었다.
2월 상순경 최린은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만나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윤치호·김윤식·한규설 등 당대의 명망가들을 영입하기로 하였다. 윤치호·김윤식은 최남선이, 한규설은 최린이 교섭하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참여를 사양, 내지 거부하였다. 할 수 없이 방향을 바꿔 천도교 이외 타 종교계의 인사들을 영입하기로 했다.
처음 선이 닿은 사람은 기독교 인사 가운데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이었다. 2월 12일 상경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추진계획을 듣고 흔쾌히 동참하였다. 그는 정주로 돌아가 평안도 기독교계 인사들의 의사를 수렴한 후 2월 17일 경 다시 상경하였다. 2월 21일 최린은 이승훈을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여 독립선언을 하고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경비조로 5,000원을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불교 쪽이었다. 최린은 일본유학 시절 알게 된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독립선언 계획을 발표하고 동참을 호소하였다. 한용운은 자신은 물론 불교계도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2월 20일 최린은 권동진의 집에서 권동진·오세창·이승훈 등과 함께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민족대표를 일정한 비율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당시 최린은 무리에서 재사(才士)로 통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최린의 공로는 지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