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모
최성모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어려서부터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5세 되던 1888년(고종 25) 그는 식년시(式年試)에서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가 벼슬길로 나선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펴낸 <한국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의 부인 김숙현(金淑賢)은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주신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김주신(金主信)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최성모는 아내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외아들 경환(景煥)에게 '어머니는 어리석은 여자'라며 기독교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국운은 기울고 정세는 혼란했다. 그 무렵 그는 친구 이필주(李弼柱)와 함께 우연히 남대문로의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대강연회 포스터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시국강연을 듣고 큰 감화를 받은 그는 마음의 변화를 느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길로 귀가한 그는 배재학당에 다니는 아들을 불러 가위를 가져 오라고 하고 직접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그는 상동교회에 출석하였다.
1908년 세례를 받고 감리교회에 입교한 그는 1912년부터 서강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그로부터 신앙지도를 받았던 최석주는 "그의 설교는 웅변이 있고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서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감명 깊은 말씀으로 들렸다"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넣어주었고 또 한편으로 용기를 넣어주어 선생이 서강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나간 사람이 4~5명이나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무렵 그는 전도활동 이외에도 전덕기 목사의 지도 아래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YMCA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전 목사는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양기탁·이갑·윤치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 기사(1910.5.3.)에 따르면, 그는 서울 종로 YMCA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청년의 활동'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초보 목회자로 활동 중이던 그는 신학공부를 해야 선교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였다. 1913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당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서울 도렴동 소재 종교(宗橋)교회에서 홍종숙(洪鍾肅)·정춘수(鄭春洙)·손정도(孫貞道) 목사 등과 함께 여러 차례 특별전도회를 연 것으로 나와 있다.(매일신보, 1915.5.27·28.) 종교교회는 미국 선교사 조세핀 켐벨이 1908년에 세운 감리교 교회다.
얼마 뒤 감리교의 연례집회인 연회(年會)에서 그는 만주 봉천교회 목사 및 내·외몽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후 그는 1917년 해주 남본정(南本町)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고향에서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박희도로부터 3.1선언 소식 듣고 적극 동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