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영
오화영(吳華英)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국사(菊史), 다른 이름으로는 화영(華泳), 하영(夏英)이 있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오재식의 책에 따르면, 1904~1908년 사이에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 동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구국의 열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는 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시절 원산여(女)선교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 성경학원에서 발족되었는데 흔히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다. 이 성경학원은 전도부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원산여선교회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 Noyes)는 아래와 같은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이곳(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 회(band)를 하나 만들었는데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내서 전도부인 1명을 보조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님 사업에 있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종교교회 담임목사 시절 그는 도도히 흐르는 3.1혁명의 역사적 물줄기와 만나게 된다.
3.1혁명 보름 전인 1919년 2월 16일, 정춘수가 그가 시무하고 있던 종교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당시 원산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정춘수는 오화영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날 밤 정춘수는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에게서 들은 말이라며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천도교 측에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화영 역시 신문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듣고서 조선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다. 한일병탄 후 '심한 고통과 불안감'을 갖고 있던 그로선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박희도를 만났다. 박희도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3일 뒤인 2월 20일 밤, 오화영은 창신동 박희도 집에서 이승훈·신홍식·오기선·정춘수 등과 만나 천도교단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은 개성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 무렵 그는 신석구에게 동참을 권하였고, 27일 그로부터 최종적으로 약속을 받아냈다.
이튿날 21일에는 함태영·이승훈·현순·박희도·신홍식·오기선·안세환 등과 함께 이갑성의 집에 모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 문제를 다시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화영은 개성을, 이갑성은 경상도를 맡기로 했다. 또 일본 정부 등에 제출할 청원서는 함태영이 책임지고 준비하고 현순은 상해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통지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22일, 그는 약속한 대로 개성으로 떠났다. 개성 남부예배당에서 김지환·오세진·이경중·최중순·이강래 등을 만나 서울의 거사 준비 소식을 알려주면서 동참을 호소했다. 23일에는 보통학교 교사 이만주와 미국인 교장 이영덕에게도 서울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날 그는 남성(南星)병원으로 친동생 오은영(吳殷英)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의 집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25일 박희도로부터 거사일이 3월 4일에서 1일로 변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에는 함태영·이승훈·박희도·이갑성·이필주·안세환·최성모 등과 만나 일본에 보낼 기독교 대표로 안세환을 결정했다. 이날 이들은 한강 인도교에서 만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많아서 인근 일식집으로 옮겨 얘기를 나누었다.
27일 이필주 집에 이승훈 등 10명이 모여 선언서와 청원서 초고를 살펴보았다. 거사 전날 28일 밤, 재동 손병희 집에 동지들이 모여 최종점검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갑성이 학생 등 많은 사람이 공원에 모이다 보면 소요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결국 거사장소를 탑동공원에서 명월관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29명이었다. 선언식이 끝난 후 33인 일행은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나온 관헌들에게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당일부터 경찰이 취조를 하였고 얼마 뒤부터 재판이 이어졌다. 3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있은 검찰 취조 때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그는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연유 등을 당당하게 밝혔다. '언제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그는 '남의 조선이 된 조선이 또 다시 나의 조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갖고 있었다'고 답했다. (매일신보, 19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