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망명 시절의 모습. 앞줄 오른쪽부터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자료사진)
1897년 9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도쿄에 가서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1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때 일본서 근대문물을 접하고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02년 유길준이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 소위 '개화당 사건'에 연루돼 190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동학혁명의 주모자로 몰려 망명해 있던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와 만나게 됐다. 중인 출신인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였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손병희뿐만이 아니었다. 구한국 정부의 무관 출신의 권동진(權東鎭)과 관료 출신의 양한묵(梁漢默)도 만나게 됐다. 이들은 일본 망명 시절 손병희를 좌장으로 모시며 평생 동지로 결의하였다. (나중에 이들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는데 바로 이때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옛것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문명을 절충한다는 대한제국 정부에 맞서 서구의 근대화를 모델로 한 문명 개화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상소를 통한 개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병희는 방향을 바꾸어 행동에 나섰다. 그는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에게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민회는 처음에는 대동회라고 했다가 중립회(中立會)로 바꾸고 나중에는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이 무렵인 1904년 오세창은 도쿄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고로 동학에 입교했다. '사람의 마음은 곧 하늘이다'라는 교리를 믿고 입교했다고 한다.
한편 진보회는 1904년 말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하였다. 그런데 이 일진회가 1905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용구의 매국행위로 동학교도들의 반발이 나오자 손병희는 그해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국내사정이 급변하자 손병희는 귀국을 서둘렀다. 도일한 지 만 4년만인 1906년 1월 5일 귀국한 손병희는 먼저 교단을 정비하였다. 그해 9월에는 이용구와 그 휘하의 62명을 출교(黜敎) 조치를 취하고는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손병희 등과 함께 귀국한 오세창은 1906년 2월 10일 천도교 교수(敎授)로 임명됐다. 이후 중앙총부 이문관장(理文觀長), 현기관장(玄機觀長) 등을 맡아 천도교의 조직과 제도 및 교리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귀국 후 그가 맡은 중책은 또 있다. <한성순보> 기자 경력을 살려 그해 6월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했다. 신문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고 정부의 개혁정책을 견인할 생각이었다. 주필은 이인직(李人稙)이 맡았는데 그는 <만세보>에 최초의 신소설 '혈의 루'를 연재하였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했던 오세창은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 출신 인사들과 함께 대한협회를 창립해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만세보>가 창간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자 대한협회 기관지로 <대한민보>를 창간해 다시 사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평의원, 재일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 후원단체인 대한학회 찬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각종 계몽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그는 선진 일본과 동맹을 맺어 문명개화를 주장했을 뿐 이용구와 같은 합병론자는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그는 칩거하였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대한민보>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관심을 두었던 곳은 서화계 하나뿐이었다. 김가진, 안중식, 이도영 등과 함께 오늘날의 화랑 격인 서화포(書畵鋪) 개설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서화미술회가 개설되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6월에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11월, 4년여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자 전후처리를 위해 이듬해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비롯해 연합국 측 27개국 대표가 모였다. 골자는 독일 등 패전국의 전쟁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유지를 위한 조치 등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쟁 중인 1918년 1월 '세계평화 수립의 원칙'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도 소위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약소국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어를 익힌 오세창은 귀국 후에도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을 구독했다. 신문을 통해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사실을 접한 그는 조선인들도 민족자결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기는 일제의 차별정책 때문이었다.
오세창의 처음 생각은 독립선언 형태는 아니었다. 차별대우로 인한 불평에서 기인한 것이다 보니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한일병합도 반대하지 않았다. 만약 일제가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준다면 총독정치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당시 오세창의 생각이었다. 3.1독립선언으로 구속된 후 그해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공판 때 그는 그런 진술을 했다.
오세창은 또 재판장이 '왜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민족자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답했다.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을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선언서에 이름을 냈으므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초부터 성공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금후 그런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장황하게 답했다.
위 내용에서 보다시피 당시의 오세창한테서 결연한 독립의지를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앞으로도 독립운동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펴고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출발이 좀 달랐기 때문이다. 1918년 12월말 오세창은 조선의 민족자결을 실현하는 방안으로 우선 조선의 자치(自治)를 제창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치란 일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율적 행정'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정부에 행정자치 청원운동을 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천도교 인사로 3.1선언 실무에 두루 관여
그런데 이듬해 1919년 초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상해 등 재외 한국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보내 독립의지를 밝히기로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린을 통해 재일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무렵 송계백은 선언서를 찍을 인쇄기 구입 및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해 있었다. 급기야 오세창은 손병희·권동진·최린과 협의하여 자치권 청원 대신 독립청원 방식을 추진키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 변수가 하나 생겨났다. 1월 중순경 손병희는 박영효를 방문하여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국민대회 청원서에 협조를 부탁했다. 그런데 결과는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박영효는 총독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청원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오세창은 2월 25일경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조선신문>에 실린 '피비와 같이(血雨)'라는 기사를 보고 2.8독립선언 소식을 알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손병희는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홍기조·홍병기·김완규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어냈다.
천도교 밖의 동지를 규합하는 일은 최린이 맡았다. 최린은 우선 한용운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 다음엔 당시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높던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계도 동참시켰다. 2월 20일 오세창은 권동진의 집에 모여 최린·이승훈 등과 민족대표로 천도교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 총 32인으로 하자고 결정하였다. (2월 27일 밤 신석구 목사가 참여해 총 33명이 됨)
오세창은 거사 기획에서부터 실무 전반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여하였다. 권동진으로부터 선언서 원고를 받아 베끼기도 하고 이종일에게 서명자 변동 상황을 알려줘 바로잡기도 하였다. 2월 27일에는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 등 최종 확인 작업을 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용지 보급 등 인쇄 작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예정대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쳤다. 선언식 참석자 29명 전원은 현장에서 체포돼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당초 거사장소로 삼았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서 별도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