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종 아들 이규태
박만순
전주 이씨 후예인 이규태(1942년생)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그런데 영동군 영동읍 심원리에 살던 외조부는 이경종이 양반 집 자제라는 이유로 딸 김희연을 시집보냈다. 외조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위에게 땅을 주고 3년 동안 매해 송아지 한 마리씩을 줬다. 이토록 가난했기에 경종과 복종은 초등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셋째인 삼종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곤궁이 이경종 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 전체에 해당되었다. 1930년대 중반 봉현리는 80호 4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그 중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3명이었고, 재학생이 4~5명에 불과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키 위해 봉현리 출신 이종(1911년생)은 마을에 야학당을 개설했다. 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야학을 개설한 이종은 19세에 상경해 무산자교육기관인 '고학당'에 입학했다. 김삼룡, 유축운, 이능종 등이 그의 선배였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밥벌이를 했다. 밥벌이는 주로 '영신환팔이'를 했다. 일부 야학생들은 <신소년> <별나라> <비판> 등의 잡지를 읽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접했다.
봉현리에서 야학을 하다가 <사회주의의 대의>라는 책이 발각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종은 타 지역을 다니며 생계에 전념하기도 했다. 해방을 영동에서 맞이한 그는 영동군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활동공간을 이전해 남로당 청주시당 부위원장 겸 선전책을 하기도 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충북 영동과 청주에서 간부로 활동하던 이종과 이경종·복종·삼종 형제는 6촌간이었다. 특히 무학자였던 경종과 복종은 마을의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이종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종이 야학당 선생이기도 했지만, 그의 식견이 워낙 탁월했기에 봉현리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6촌 형 이종의 영향을 받은 복종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고, 경종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에서 지냈다. 삼종은 앞서 얘기했듯이 전쟁 전 행방불명되었다. 이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종의 삶... 그는 결국 북한으로 갔다
1949년 종로경찰서에 붙잡힌 이종은 치안국 사찰과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북한군의 옥문개방으로 풀려난 그는 한강 마포에서 원유도하 사업을 맡다가 UN군 수복기에 북으로 후퇴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1년 초겨울 금강정치학원에 입소했다. 소위 '남파간첩 교육기관'이다.
'똑똑'하는 소리에 이어 "동무들 하선하시오"라는 소리가 배 갑판에서 들렸다. 캄캄한 새벽에 배에서 내려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마을 이장한테 갔다. "이장님! 군산으로 장사하러 가는 사람인데, 길을 잃었습니다. 통통배 하나만 내 주세요." 하지만 이장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야 이 사람아! 풍랑이 이렇게 심한데 배를 어떻게 띄워?" 그러자 이종은 조용히 이장의 주머니에 돈 봉투를 찔러줬다. 돈의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어이 ○씨, 이 양반 군산까지 태워다 줘."
충남 당진을 거쳐 전북 군산에 도착한 때는 1953년이었다. 그는 북한과의 선이 끊겨 소위 간첩 활동을 하지 못했다. 모시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낚시를 즐겼다. 그러다 하루는 군산시장에서 고향 사람 박○○을 만났다. 북한에서 교육받을 때 "친척이나 지인을 만나면 즉시 근거지를 옮겨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설마' 했다. 그날 밤 영동 경찰들에게 붙잡힌 이종은 만 10년간의 옥살이를 꼬박했다.
그가 풀려난 때는 1969년이었다. 갈 곳 없는 그에게 귀향을 권유한 이는 이경종이었다. 어찌 보면 가족의 불행이 육촌형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건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의 불행을 '시절 탓'으로 돌린 그는 육촌형을 집으로 데리고 와 깍듯이 모셨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노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 둥구나무 아래서 항상 책을 읽던 모습을 7촌 조카 이규태는 기억한다. 이규태(78세. 영동군 영동읍)는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갔을 때요, 이종 아저씨가 마을 노인들한테 '저기(달)에 가면 중력 때문에 한 번 쓰러지면 힘들어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요'라고 이야기기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1969년 만기석방 된 이종은 육촌 동생 이경종의 집에서 2년간 머무르다가, 영동읍 조심동에 살고 있던 친누나 이인의 집으로 가 4~5년을 살았다. 이인의 손자 임두환(80. 영동군 영동읍)은 "이종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서 한겨울에도 철길 옆 개울가에서 냉수마찰을 했어요,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었어요"라고 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