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덕
15세 때인 1882년 그는 원주 원세화(元世華)의 장녀와 결혼하였으며, 1884년 상주군 화령면 학평리로 옮겨 신혼생활을 하였다. 1885년 자신을 가르치던 임규호(任奎鎬·일명 任弓鎬)로부터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도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동학의 교리에 공감하여 그해 4월 27일 임규호의 천거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1886년 2월 그는 당시 상주군 화서면 전성촌(前城村)에 기거하고 있던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 최시형은 수도 정진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면서 영부(靈符·동학의 부적)를 친히 써주었다. 이후 그는 매일 동학의 주문을 3만 번 외우고 목욕재계를 하며 수련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천사(天師)가 집안에 난 불을 꺼주는 신비한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20세가 되던 1887년, 그는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 무렵 권병덕이 충청·경상도 두 곳에서 포교한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일로 그는 최시형 교주로부터 청주접주에 임명되었다. 충북 보은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본부 역할을 한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될 때 그는 중정(中正)의 중책을 맡았다. 1889년에는 강원도 인제에서 최시형을 호종(護從)하기도 하였다.
동학혁명 발발 1년 전인 1893년 2월 최시형이 미원면 용곡리 그의 집에 머물며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문 앞에 엎드려 올리는 상소)를 준비하였다. 2월 11일 그는 서울로 올라가 교조(敎祖) 최제우의 신원(伸寃·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줌)과 동학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며 복합상소를 하였다. 그해 3월 보은 집회에 참가한 권병덕은 충경포(忠慶包) 대접주(大接主) 임규호 휘하의 차접주(次接主)에 임명되었다.
1894년 1월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北接)은 무장봉기에 반대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다가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는 1894년 9월 말 최시형의 명을 받아 관하 도인을 이끌고 기포(起包·봉기)하였다. 1894년 10월에는 충경포(忠慶包)와 문청포(文淸包) 도인 3만 여명을 이끌고 충북 보은으로 가 중군 통령(統領) 손병희 휘하에서 후군(後軍)을 맡았다. 보은전투 등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큰 희생을 치른 그는 이후 상인으로 변장하여 경북 상주·김천 등지로 도망을 다녔다. 당시 그는 최시형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전희순과 함께 경남 일대의 접(接)을 순회하고 교인을 독려하였다. 1898년 3월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그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김연국(金演局)과 함께 최시형을 보필하였다. 그해 6월 최시형이 교수형으로 순국하자 이번에는 김연국을 보필하며 도망을 다니면서 교인을 단속하였다. 1901년 김연국이 체포되자 그는 김연국이 사형을 면하도록 활동하면서 김연국의 석방을 도왔다. 1905년 말 김연국으로부터 정암(貞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901년 일본으로 피신해 체류 중이던 손병희는 1906년 1월 5일 4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에 앞서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부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도교는 교헌(敎憲) 제정, 교구제와 의회제 실시, 신 교리서 발간·보급 및 교인 교육 등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손병희는 이를 통해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배운 문명개화사상을 교인들에게 보급하고 교회를 근대화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손병희가 귀국한 직후 권병덕은 김연국·김낙철·원용일 등과 함께 단발을 하고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는 천도교의 문명개화운동 혹은 근대화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 표시의 일환이었다. 이후 권병덕은 천도교 간부로서 교회의 정비와 교세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1906년 2월 천도교 대정(大正)의 원직을 받고 이문관(理文觀) 서적원(書籍員)에 임명되었다. 1906년 5월에는 천도교에서 실업을 장려하기 위해 조직한 상업사(商業社) 발기에도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전라도 순독(巡督)에 임명돼 전라도 지역의 교인과 교구를 관리하고 교당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1907년 7월 16일 천주(薦主)가 되었으며, 김연국이 대도주(大道主)가 된 직후인 1907년 9월 5일 현기사장(玄機司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에서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모셨던 김연국이 1907년 12월 손병희계의 인사과 갈등을 빚고 천도교에서 나오자 그도 따라 나왔다. 손병희의 측근으로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李容九)는 송병준의 유신회와 합쳐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다. 이 일로 손병희가 이용구 일파 62명을 출교(黜敎)시키자 이용구는 1907년 4월 5일 시천교(侍天敎)를 창건하였다.
김연국이 시천교로 옮기자 그도 같이 옮겼다. 이때 이용구를 따라 시천교에 입교한 사람이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이 일로 천도교의 주력인 서북세력이 빠져나가면서 72개였던 대교구는 23개로 축소되었다. 호서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연국계도 문명개화파가 간부직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해 시천교로 이적해 버렸다. 시천교는 김연국에게 교주 격인 대예사(大禮師) 자리를 내주었다. 시천교는 동학의 '서자(庶子)'라는 세간의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동학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하면서 천도교와 종통(宗統)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시천교로 옮긴 권병덕은 시천교 교수(敎授)로서 소년입지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일반인 교화에 힘썼다. 1909년 3월 관도사(觀道師)의 지위에 올랐으며 얼마 후에는 봉도(奉道)가 되었다.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 간행하였으며, 1912년 1월에는 시천교본부 종무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또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1907년 12월 1일 사립중앙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대한협회에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 10월에는 박형채(朴衡采) 등 시천교인 50명과 태인군(泰仁郡·현 정읍시)에 농산(農産)조합을 설립하여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1913년 초 권병덕은 시천교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송병준의 교권 장악과 독단적 운영에 반발한 때문이었다. 결국 이해 3월 김연국계는 시천교총부를 설립하여 시천교본부와 결별하였다. 1913년 5월 시천교총부의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된 그는 이듬해 1914년에 <시의종경(是儀經政)>을 편찬하였다. 그 무렵 시천교총부가 서도교인파와 남도교인파로 분열되자 내분 끝에 1915년 4월 시천교에서 출교(黜敎)당하였다. 이후 권병덕은 중앙시천교회본부를 개교하여 독자 노선을 걸으며 시천교의 한 지파(支派)의 수장이 되었다. 이 단체 역시 친일성향을 띠었는데 그 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대정(大正)의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16년 권병덕은 참회식을 거쳐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휘하의 이근상·손필규·박준관·김기태 등 30여 명의 지도자 및 그 소속 교인들로 함께 따라 왔다. 그는 1917년 9월 장석승례(丈席承禮), 1918년에는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 중앙총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교인 교화 및 교세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천도교 복귀 후 그는 전제관장·이문과장대리·금융관장·보문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3·1혁명 직전에는 손병희의 집사 격인 승례(承禮·일명 接待係)를 맡아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당시 그는 친일 성향의 시천교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용구 일파와 함께 한일병탄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유로 일경에 체포돼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천도교에 귀의한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손병희 등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나는 처형을 각오하였다"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을 계기로 국내외의 민족진영은 조선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조직돼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면서 국내와 연락을 취하였다.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준비하면서 상해와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노령(露領)과 미주의 한인들도 전로(全露)한족대회,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독립투쟁을 준비하였다.
한편 천도교에서는 1918년 말부터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교주 손병희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초 천도교는 행정자치 청원이나 독립청원을 하는 수준에서 검토했었다. 그러다가 재일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1919년 1월 말 독립선언을 하기로 최종 방침을 정하였다.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 민족대표의 선정 등에 대하여 협의하여 1919년 2월 20일경 대체적인 사항을 마무리하였다.
1919년 2월 21일 권병덕은 손병희로부터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맹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물론 손병희의 제의는 그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일본의 조선 병합을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갈망해온 권병덕은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는 총독부의 조선인 차별정책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식민지국가가 독립될 것이므로 조선도 독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월 26일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천도교 측 민족대표들의 모임이 열렸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에는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전체 민족대표들이 모여 최종점검회의를 가졌다. 그는 두 차례 모임에 모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 등에 서명하고 동지들과 함께 결의를 다졌다. 3월 1일 오후 1시 반, 그는 손병희·오세창 등과 함께 태화관으로 갔다. 오후 2시가 되자 참석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열고 마지막 순서로 만세삼창을 하였다. 이후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