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관의 이름이 들어있는 석각
황정수
석벽의 오른쪽에 박효관과 관련된 글씨가 있는 것은 이유원과의 인연에서 생긴 것이다. 이유원은 악부를 비롯하여 우리말 노래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원이 이항복의 후손으로 필운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박효관이 감동(監董)의 역할을 맡으면서 교유하게 된다. 그래서 박효관은 필운대 주변에서 가곡을 향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이 모임이 유명한 '승평계(昇平契)'이다.
또한 필운대 근처에는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의 집터가 있다. 그 집터에는 권율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수백 년 된 위용을 자랑한다. 이 터와 은행나무는 기가 센 것으로 유명하여, 무속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지금도 많은 집들 사이에 꿋꿋이 서 있는데, 그 굵은 나무줄기 사이에 서려 있는 기운이 다난한 역사의 영화와 쇠락을 보여주는 듯하다.
필운대 봄놀이
조선시대 서울에 사는 시인 묵객들은 봄이 되면 옷을 가벼이 입고 멀지 않은 인왕산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사직단 뒤쪽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필운대에 올라 봄꽃 구경을 하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고 평평한 바위가 많고 주변에 봄에 피는 꽃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필운대 아래 서촌에는 재주 있는 양반·중인들이 많이 살아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더욱 유명해졌다.
필운대 일대는 산수 풍광이 볼 만함은 물론 살구꽃과 복사꽃 같은 여러 가지 꽃이 많았다.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하여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다. 특히 '필운대 부근의 살구꽃'(弼雲杏花)은 '행촌(杏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동대문 밖의 버들'(興仁門 楊柳), '성북동의 복사꽃'(北村桃花)과 더불어 장안의 구경거리로 꼽혔다.
안대회 교수의 책 <고전 산문 산책>에는 유본학(柳本學, 1770~1842?)이 쓴 <유육각봉기(游六角峰記)>가 실려 있다. 이 글을 보면 당시 필운대에서 봄놀이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본학은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이며, 유본예의 형이기도 하다. 세 부자는 모두 문명이 높아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계해년(1803) 봄 3월 10일, 생원 한대연을 찾아갔다. 대과에 낙방한 대연은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나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하였다. 함께 백문(白門, 서대문) 성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北山, 인왕산)의 육각봉까지 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밤새 내린 비가 아침나절에 개어, 성곽을 등진 인가마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한창 곱게 피었고, 성 밑으로 호젓하게 이어진 오솔길은 향기로운 풀이 뒤덮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계곡을 건너고 소나무 숲을 지나 들뜬 마음으로 신명나서 걷다 보니 어느새 육각봉에 이르렀다. 풀밭에 앉아 잠깐 쉬면서 북쪽 동네에 피어 있는 꽃을 구경했다. 그런 다음 오씨네 동산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노닌 사람 모두가 술에 취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혼자 취하지 않았는데, 대연이 강권하여 억지로 석 잔이나 마신 탓에 주량이 약한 나는 더욱 크게 취하고 말았다. 이날 봄나들이에서 나보다 더 취한 사람은 없었다. 서대문 성곽부터 육각봉까지는 한양에서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빼어난 곳인데 오늘 모두 다 구경했다. 그렇다면 봄놀이를 두루 즐긴 것은 또 올해만한 때가 없을 것이다."
육각봉은 필운대 주변 넓은 자락이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시문을 좋아하고 취흥에 젖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그곳에 모여 상춘놀이를 하곤 했다. 복사꽃, 살구꽃 핀 풍경과 주변의 아름다운 환경이 절로 술 맛을 돋운다. 이 글은 당시 중인 문객들의 놀이 문화의 현장을 생생히 잘 보여준다.
정선의 작품 <필운대>와 <필운상화>
화가들이 필운대에 올라 그림으로 남긴 흔적은 아무래도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정선은 실경산수를 잘 그렸고, 많은 실경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인왕산 지역을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장동팔경(壯洞八景)'이라 불리는 첩 등이 그것이다. 장동팔경 중에 필운대를 그린 것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필운대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다.